너 게이 아니야?

카오산로드에서 만났던 사람들.

by 데이터공방



"Khaosan Road"

방콕행 편도 티켓 한 장만 끊고 떠났던 배낭여행.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머무를 호텔 주소를 적으라는 말에 무작정 "Khaosan Road"라고만 적어 제출했다.

"그래서 호텔이 어디야?"라는 말에, <Khaosan Road>에 모든 길이 있을 텐데 왜 물어보냐는 듯이

너무나도 자신 있게,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무모하게 "카오산 로드"라고 말했었다.

심사관의 '뭐 이런 녀석 다 있나' 하는 표정. 무식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어쨌든 그렇게 모든 길은 카오산 로드로 이어졌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여러 번 본 책인 듯한 박준 작가의 <On the Road> 영향이지 않을까,,,



카오산 로드의 게스트하우스 스무 군데 넘게 발품을 판 끝에, 하루 70밧 정도 하는 가장 저렴한 숙소에 짐을 풀었다. 파라 쑤멧 요새 근처, 가장 외진 곳, 구석에서 찾은 삐걱이는 침대 하나, 낡은 팬 선풍기 하나 있던 작은 방. 무슨 비밀아지트라도 되는 냥 좋은 곳 찾았다며 한참을 신나 했었다. 사진기 하나 들고 이리저리 똥폼을 잡으며 사진 찍고 돌아다녔던 첫날 저녁, 근처 노점에서 팟타이에 맥주 한 잔을 곁들이며 글을 쓰고 있는데 옆 테이블의 한 무리가 나를 힐끔거렸다. 합석하지 않겠느냐는 그들의 제안에 나는 용기를 내어 응했다.


밝은 표정의 미국인 남녀는 나를 환대해 주었지만, 함께 있던 태국 남자 두 명은 어딘지 탐탁지 않아 보여 혼란스러웠다. '이 사람들은 어떤 관계일까', '계산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긴장하고 있을 때, 독일에서 왔다던 여성이 불쑥 물었다.

"너 혹시 게이 아니야?"

나는 당연히 아니라고 답했다.

마치 그런 나쁜? 이상한? 사람 아니라는 듯이, 왜 나를 이상하게 보냐는 느낌을 들 정도로 깜짝 놀랐었다.

그러자 그녀는 웃으며 이 테이블에 있는 남자들은 모두 게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때까지 나는 게이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고, 막연히 '이상한 사람들'일 거라 편견을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직접 대화해 본 그들은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었다. 편견 없이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배려심이 몸에 배어 있었다.

편견 없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들. 편견에 갇히지 않고 열려 있다고 생각하던 나와는 다르게, 정말 열려 있는 사람들.


2차로 게이바에 가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는 덜컥 겁이 났다. "네가 가면 거기 사람들이 엄청 좋아할 거야"라는 말에 옆의 태국인들은 질투 섞인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었던 나를 위해 그들은 긴바지로 갈아입고 올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고까지 했지만, 결국 두려움과 피곤함을 핑계로 거절했다. 이제 와 돌아보니 '그때 한 번 가볼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후 대학 졸업 후 성 정체성을 찾은 친구를 보기도 하고, 여러 경험을 쌓으며 세상엔 정말 다양한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며, 의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임을 깨달았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을 뒤흔들고, 내 안의 편견과 오만을 깨뜨려 준 카오산 로드의 그들이 고맙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서로를 알아보기조차 쉽지 않겠지.


이후 여러 경험을 통해 나만의 판단 기준이 생겼다. 무언가를 할지 말지 고민이 될 때는 딱 두 가지만 자문해 본다.

첫째, 나 혹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가?

둘째, 하지 않았을 때 후회가 남을 것인가?

그때 이 기준이 있었더라면, 두려움을 뒤로하고 기쁘게 그들을 따라나섰을 것이다. 타인의 시선이나 막연한 불안 때문에 소중한 경험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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