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게 나빴던 일들을 통째로 머릿속에서 지우고는 했다. 그런 일들이 내 인생의 역사에 없었다는 것 마냥 굴었다. 누군가 은근히 물어봐도, "이상하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데도 잘 기억이 안 나. 너희랑 노는 게 너무 즐거워서 그런가봐. 다른 이야기 하자. 너는 어땠어?" 같은 말로 너와 나를 속이고 모두 덮고 싶어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 기억들은 내 인생에서 사라진 것만 같았다. 나는 그대로였는데, 유치원의 소문이 망령처럼 따라다니다가 멈춘, 중학교 입학을 기준으로는 나는 갑자기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사람들이 내 말을 들었다.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나는 그 당시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다가 또 환영받았다. 그러다가 또 갑자기 배척받고, 나쁜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또 받아들여지고. 또 누군가는 나를 경멸하고 싫어하고. 나는 모두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당시 그런 생각을 했다.
나쁜 일은 잊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오늘 하루에만 집중하다 보면 언젠가 모두 나아질 것이다, 라고.
좀 더 본격적으로 말을 해보자면. 나는 성실하게 강박적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배척받았었고 또 그 이유로 환영받았다. 그리고 어른들에게 버르장머리가 없었다는 이유로 배척받고, 또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과정을 거쳐서 떼쟁이처럼 멍청하고 유치한 방식으로 학원을 끊었기에 배척받았다. 학원을 끊는 과정은 끔찍했다. 아빠는 그 당시 공포에 질려있었던 것 같다. 자식이 학원을 끊겠다고 선포하는 건 자신의 가정에 큰 재앙이 들이닥치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내 순화된 표현과 설득에 넘어갔다가도, 아빠를 설득하지 못했다. 아빠는 겉으로는 나에게 동의하는 척 하면서, 뒤에서 엄마에게 윽박지르고 화를 내면서, "네 행동거지때문에 애가 우리를 만만하게 보고 학원을 끊으려는 것 아니냐, 너 때문이다."라며 화를 버럭버럭 냈다. 그러면 엄마는 아빠에게 들은 말들에 상처를 입고 내게 찾아와서 너 대체 왜 그러냐며 돌연 내게 화를 냈다.
그러다가 결국 나는 학원을 말없이 빠지고, 밤 10시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다가 집까지 홀로 걸어가는 일을 반복했다. 엄마는 학원 선생님께 푸념을 했다. "우리 애가 바닥에 드러누워서 고함을 지르면서 고집을 피우는데 엄마인 나도 감당할 수가 없네요." 나는 그런 짓을 유치원때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 고집과 떼 쓰는 행위는 우리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우리 집에 감도는 은근한 긴장과 군기는 절대 나로 하여금 그렇게 굴 수 없었다. 내가 울음이라도 터뜨리면 윗형제 선에서 모두 정리가 되었다. 나는 10분은 커녕 3분도 그렇게 있지 못하고 방에 끌려가서는 엄청나게 맞을 것이 뻔했기에,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엄마는 그걸 알면서도 내 험담을, 거짓된 일로 지어낸 험담을 어른들에게 퍼뜨렸고, 어른들은 또 내 또래의 친구들에게 퍼뜨렸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께 드러누워 떼를 쓰는, 공부하기 싫어서 말도 안하고 학원을 빠지는 이상한 애. 말도 안되게 나약하고 유치한 애. 학교에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른 애로 인식이 된 것이다.
나는 그런 상황이 이어질 수록 내가 할 수 없는 분야에선 신경을 끄고, 대신 정신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 당시 내 환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으로 최선을 다해봐도. 내 미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누구를 원망해야 하고 누구에게 항의해야하는지도 몰랐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 다시 익숙하게 미움 받는구나, 생각하고는 다시 열심히 긍정적이게 되어보려고 하고, 내게 있던 안 좋은 일을 잊어보려고 하고. 더 완벽하고 강박적으로 굴면서 예전의 그 호의들을 받으려고 애를 쓸 뿐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유사심리학과 유사 종교 서적들을 계속해서 읽어내려가자, 아이들은 더 나를 꺼려했다. 이상하게 바라봤고, 나는 광신도 같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자각몽, 명상, 동양수련 같은 말에 혹 넘어가면서 계속 심취하려고 했다. 그런 것들이 날 구원해주리라 믿으면서. 그런 것들을 믿는 내가 특별하다고 믿으면서. 나는 특별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언제든 정말 사람들이 동경할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나는 그런 것들이 날 구원해주리라 믿었고, 아이들은 그럴수록 나를 더 괴상하고 기이한 존재로 봤다.
그 신념은 한차례 꺽였다. 과학고에 가고 싶었지만 과학고에 가겠다는 말을 선포하자마자 받은 여러 비웃음들, 그리고 갑자기 내 앞에서 "너 과고를 가고 싶다고 했지?"라는 말을 내뱉으며 수행평가 점수를 내가 보는 앞에서 온갖 트집을 잡으며 전부 깍아내리며 어거지로 점수를 낮게 해서 다시 주는 선생님. 그리고 "악기를 2개는 다룰 줄 알아야 한데."라며 너는 그런 거 못하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과고 진학을 포기하게 하려는 담임 선생님.
내가 악기를 2개가 아니라 3개를 다룰 줄 알고, 부모님이 과학고 입시 설명회를 가지 않으면 탈락한다고 해서 엄마가 설명회를 들으러 고속버스를 타고 타지역까지 가고. 열심히 인터넷을 찾아보라는 말만 무책임하게 하며 계속 나도 찾아봤지만 아무리 봐도 지원 자격에 악기를 다뤄야 한다는 말을 찾지 못해서 더 미궁에 빠진 나를 두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부모님의 탄탄한 지원과 방어로 국제고에 합격하여 진학하게 된 또래 아이 한명, 그리고 부모님을 설득시키기 위해 교장 선생님이 불러왔다는 외고 지망생의 다른 애 한명. 그리고. 합격은 커녕 원서를 넣지도 못했고 사방에서 비웃음만 크게 당한 나는 교무실에 불려가 설득당하는 부모님도 없이. "네 까짓게 해봤자 뭐를 한다고."라는 시선을 받으면서 중학교 3학년의 여름방학이 지나갔다.
나는 그 당시 모든 걸 포기한 채로 약간은 외면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가벼운 소설들에 깊게 빠져 있었고 특히, 인터넷에서 보게 된 해리포터의 패러디 소설이라는 것에 푹 빠져 있었다. 악당 볼드모트의 학창시절의 서사에 깊이 빠졌다. 누가봐도 불리한 상황에서 뛰어난 두뇌와 끈기로, 어떻게든 자신이 처한 극악의 상황을 헤쳐나가서 결국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하는 인물. 악당이 되든 착한 사람으로 바뀌든 간에 결국 공통점이 있었다. 그는 성공했다. 나는 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게 단지 인터넷에 쓰인 가상의 인물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진심으로 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소설에서 묘사되는 방식대로 살고 싶었다. 일찍 일어나서 정원을 거니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많은 책을 읽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차분하고 조용해서 신임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늘 수업 시간에 바른 자세로 앉아서 차분하게 수업을 듣는 사람이 되자, 과학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너 과학고 가고 싶다고 했지? 추천서 써줄 게. 언제까지야?"
원서 접수는 이미 여름방학에 전부 끝나 있었다. 내가 신처럼 받들고 우러러보고 어려워하던 선생님들은 사실 그 과학고의 원서 접수 기간조차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 내게 너는 갈 수 있니 마니 네가 까다롭니 마니. 그런 이야기를 나눈 것이었다.
그 당시 허무함이 들었지만, 곧장 나는 생각을 전환하려 애를 썼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고, 어떻게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던 나는 그 현상을 청신호로 받아들였다. 이게 답이다. 이렇게만 굴면 언젠가 인정받을 수 있고, 그렇게만 되면 내가 다음에 무언가 하려고 할 때, 그 때는 사람들이 전부 나를 도울 것이다. 이전에는 내가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내가 천방지축이라서, 내가 신뢰할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다. 봐라, 이렇게 열심히 살고 내가 나를 통제하고, 최대한 번듯한 모범생이 되려고 하자 사람들이 바뀐 것 아닌가, 내게 우호적이게 됐다. 앞으로도 이렇게 굴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굴기만 하면 되기는 개뿔. 과학고 대신에 오빠들이 갔던 마산에 있던 고등학교를 가려고 했지만 막혔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전교 2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입학 시험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높은 등수를 기록하여, 장학금 80만원을 받고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두고 내 고등학교 진학을 막아섰던 중학교 선생님이 지나가다 인사를 해오며 말했다. "내 말 듣길 잘했지? 괜히 나서서 다른 곳 가봤자 거기 바닥만 깔텐데. 여기라도 가서 네가 장학금이라도 받는 거잖아." 그 말을 듣고 웃을 수 없었다. 애써 웃었지만 내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게 아닌데, 라는 불만이 남았다. 아무리 나를 타이르고 달래봐도, 그 불만은 사라지지 않고 도리어 몸집을 키워나갔다. 나중에는 아주 오래 그 질문이 남았다. 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했던 거지? 어떻게 했어야, 내가 비로소 내가 바라던 대로 살 수 있는 거야? 내가 노력한 대로 살 수 있는 거야?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며 휴대폰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으로 가진 휴대폰은 아주 낯설었다.
그래도 주민번호는 여전히 알려주지 않는 부모님 탓에 제약이 더 많았다. 그래서 나는 몰래 내 주민등록번호를 알기 위해서, 가족들의 주민번호가 전부 쓰인 건강보험증을 찾아 엄마아빠 몰래 엄마의 핸드백을 뒤졌다. 그런 일을 벌이면서 나는 정말 천하에 답이 없는 구제불능의 쓰레기가 된 것 같았지만, 처음에는 눈치를 보며 한두번 봤던 것이 나중에는 뻔뻔스러워졌다. 나의 도덕성이 바닥을 치고 있었고, 나는 그런 내게 짙은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게 문제였다.휴대폰을 늦게 가지게 된 것, 전자기기 제한이 걸린 것, 주민번호를 알려주지 않은 것. 그 세가지로 나는 내가 접근할 수 있던 무수히 많은 정보들에게 배척되었고, 내가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기록할 수 있던 온라인의 공간들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금방이라도 들춰지고 빼앗길 공책들에 일기를 끄적이는 것, 그리고 그마저도 빼앗겨서 엉엉 울고 펑펑 울고 나중에 구석에 쭈구려서 구겨진 채로 먼지 쌓인 채 방치되고 있는 내 일기장을 찾아 직접 쓰레기통에 쳐박는 것이었다. 온전히 내가 나만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공간조차 없어서, 나는 일상적으로 나를 속이고 기만하고 달랬다. 모든 일에 있어서 내가 못됐고 내가 잘못된 것이고, 그렇기에 내가 더 노력해야 했고 내가 더 참았어야 했다고. 내가 더 신중해야 했다고. 그렇게 수십개의 거짓말이 나를 집어삼켰고 나는 어느새 내가 숨쉬는 속도, 손바닥의 방향, 그리고 눈빛, 그런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로 나를 단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저 사람이 나를 때린다면 그건 내가 저 사람의 기분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내가 험담을 듣는다면 그렇다면 내가 건덕지를 줘서 그런 것이다. 내가.
내가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은 내가 아주 지독하게 게으르고 한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남들이 내 물건을 부수고 내 꿈을 비웃고 나를 때리고 나를 배제하면서 하는 그 말들을 진심으로 믿으려 애를 썼다. 그 말들을 믿으며 사람들을 믿고 싶었다.
사람들을 믿지 않으면 견딜수 없었다. 문득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이 나를 덮쳐오는 날이면 나는 책들에 매달렸다. 책을 읽다보면 나를 이 괴로움에서 건져낼 나를 구원해줄 무언가가 나올 것이라 믿었다. 종종 참을 수 없이 무언가를 내뱉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내가 쓴 모든 것들은 결국에는 소멸될 것이었다. 실제로 나는 저 세가지 저주에서 벗어나고 나서도, 결국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내가 썼던 온라인의 메모장, 일기, 소설들이 전부 말소되었다. 타인에 의해 강제로 내 네이버 아이디를 삭제해야 했고, 그를 검사받았다. 급하게 백업했지만 대부분의 자료는 날라가버렸고 나는 모든 의지를 잃었다.
고등학교로 올라가는 때에, 언니는 내 물건들을 전부 버렸다. 내가 기록한 메모, 내가 공부했던 기록들을 전부 버렸다. 그것들이 언니를 영원히 상처입힐 것이라도 되는 것 마냥. 언니는 갖은 말로 나를 설득했고 그걸 버리지 않는 내가 이기적이라고 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당시 언니는 언니가 오빠와 싸우고 오빠에게 맞은 게 내 탓이며, 네가 무릎꿇고 사과해야 하는 일인데 너는 네 잘못조차 모르고 반성도 하지 않으니 정말 끔찍한 동생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바짝 엎드려 용서를 빌어도 언니는 나를 용서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내가 내 물건이 버려진 건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도 괴로워하는 것도 이기적이라고 했다. 분명한건 그거였다. 언니는 힘이 있었고 나는 없었다. 언니가 나를 때려도 나를 구할 사람은 없었다. 간혹 변덕심으로 오빠들이나 엄마, 아빠가 날 구원해주기 전까지 나는 맞고만 있어야 했다. 그에 대항하거나 소극적으로 반항하는 것조차 안될 말이었다. 그렇게 하는 순간, 나는 피해자가 아니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그 누구도 날 구원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언니에게보다 더 내게 화를 내고 분노하고 처벌을 하고 싶어했다. 나를 아주 더럽고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 시선들이 나는 견딜 수 없어서 언니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순순히 고개를 숙이고 맞고, 용서를 빌고, 미안하다고 눈물을 뚝뚝 흘려야 했다.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집안 분위기는 냉랭했다. 언니는 내게 더 화를 냈다. 언니는 내가 자신과 비슷한 대학에 가길 바랬다. 그래서 계속 그런 대학들만 보여줬다. 부산의 이름 없는 대학들을 보여주면서 너는 이곳에 가야한다고 했다. 그러는 동안 언니는 즐거워보였다. 비열한 웃음도 함께였다. 언니는 수능을 망치고 멍하니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는 내게 집청소를 시켰다. 대청소를. 집 한구석에 있는 오래되고 커다란 옷장을 죄다 정리하라고. 정리하지 않으면 너는 내 손에 죽은 목숨이라고 했다. 언니는 그 말을 하며 즐거워했고, 나는 눈물만 줄줄 흘렸다. 그 안에는 내 옷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집에서 권한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남의 옷을 함부로 정리하거나 버리거나 처분하면, 나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엄청나게 야단을 맞고 얻어맞을지도 몰랐다. 또 며칠을 사람 아닌 취급을 받게 될까. 또 몇달을, 몇 년을 두고두고 그때 너는 정말 개념이 없었다고 뒷담을 듣고 앞담을 듣고 험담을 듣고 고개 숙이고 미안하다고 말해야 했을까. 언니는 그 당시 내가 크게 미움받기를 원했다. 자신이 가족들에게 미움받으니까. 그래서 눈을 내리깔고 눈물만 뚝뚝 흘리면서 가련한 척 하는 나를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너도 나처럼 발악했으면 좋겠어. 그게 언니의 훗날 털어놓은 진심이었다. 언니는 내가 자기보다도 더 추해지고 더 한심해지고 더 멍청해지길 바랬다. 자기보다 더 실패하고 불쌍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런데 나는 아득바득 계속 공부를 놓지 않았다. 그게 언니를 미치게 했다.
대학 수업을 들으러 올라오고 나서는 더 난관이었다. 가족들은 매일 전화를 걸었고 서울까지 가놓고서 아무런 말도 없이 애교도 없고 애정어린 안부 인사도 없는 내가 싸가지가 없고 되다만 놈이라고 했다. 너 같이 은혜를 모르는 애가 어떻게 성공하겠냐는 말을 들었다. 또 뻔히 내어주는 복지를 신청하지 않아서 엄청나게 욕을 먹었고, 몇시간이고 통화를 하면서 내가 한심하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고시원 샤워실에 옷을 입은 채 주저앉아서, 뜨거운 물을 내 등에 내리부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압도적인 한기가 몇번이고 내 몸을 집어삼켰다. 나는 내가 미쳐있다는 걸 알았고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해방될 수 있는지, 남들처럼 평범하고 문제 없는 사람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우울증이나 성인 ADHD나 여러가지를 생각했지만 그런 고민을 적은 공책을 오빠들에게 들켜서 크게 혼이 났었다. 너 같이 한심한 생각을 하면서 혼자 망상하는 인간이 너무 많다. 네가 환자라면 진작에 티가 났을 것이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던지 해야지 인터넷을 조금 뒤적거린 걸로 스스로 아, 나는 우울증이야, 나는 못해! 따위의 한심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네가 제대로 안되는 거라고, 되먹은 인간이라고 했다.
가족들은 계속 방 안에만 있는 내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고 그런 나를 바꾸려고 많은 자극을 주었지만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고립되고 웅크린 인간이 되었다.
내가 마스크를 쓰고 캠퍼스에 들어갔기 때문에 나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서 캠퍼스 커플에게 비웃음을 당했고,
내가 화장을 하지 않고 꾸미지 않기 때문에 오티 뒷풀이에서 맞은편에 앉은 여자애들이 쑥덕이더니 테이블을 옮겼다.
또 내가 목소리가 크고 성큼성큼 걷는 인간이라 어떤 남학생 앞자리에 앉았을 때 그가 기분 나빠하는 기색을 알고는 내가 뭘 잘못했나 반성했고,
수업시간에 열정적으로 필기한단 이유로 다른 학우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면서 험담을 나누는 걸 들엇다.
내가 김밥천국에서 겨우 밥을 먹을 때 이제는 맛있는 걸 맘 놓고 먹고 싶어서 5,000원짜리 돈까스 김밥을 시켰을 때, 촌티나는 여자애가 혼자 비싼 김밥을 먹는다는 이유로 모르는 남학우들에게 큰 소리로 비웃음과 험담을 들어야만 했다.
또 내가 과하게 눈에 띈다는 이유로 조교는 내가 결석을 잦게 했을 때 저렇게 살면 안된다고 나를 저격했다고 했고,
또 내가 학교로 돌아갔을 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왜 학교에 오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말문이 턱 막혀서 숨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그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이해할 수 없었고, 가족들이 과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서울 사람들은 내게 더 과한 존재들이었다.
둘째인 큰오빠는 나를 그나마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가 나를 불러 밥을 먹이겠다고 했을 때 나는 기뻤다. 언젠가부터 나를 어색하게 대하고 계속 화만 내던 큰오빠가 날 신경써준다는 게 좋았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가 이마트에서 산 싸구려 마블 모자를 쓰고 오는 걸 보고서, 큰 한숨을 짓더니 인상을 콱 찡그린 큰오빠를 보면서. 나는 그가 날 사랑해서, 걱정해서 부른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 자리에는 오빠의 친구들이 함께 있었고 나는 밥만 먹고 곧장 쫓겨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가족들이 원하는, 이 사회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나도 그걸 알았다. 그런데 그 사회를 맞춰간다는 게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내내 어딘가에 영혼이 빨려들어간 것 같았다.
오빠는 아마 내가 예쁜 여동생이길 바랬을 것이다. 예뻐서 친구들에게 자랑할만한 여동생이길 바랬을 것이다. 잘만하면 친구들에게 소개를 해주고 연애를 응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여동생이 아니라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나는 멍하니 창가에 앉아 창 밖을 보길 즐겨했다. 학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순간에만 숨통이 트였다. 사람들이 나를 보는 것이 너무 끔찍이도 싫었다.
왜 보는지 알 수도 없었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람들은 여전히, 날 욕하거나 좋아한다. 그게 너무 싫었다.
나는 여름방학에 언니의 특훈을 받아서 사회에 적합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적절히 입고 적절히 웃고 적절히 꾸미는 사람이 되었다.
간만에 고향에 갔을 때, 초등학교 동창이 날 보더니 놀라서 말했다. "너 정말 예뻐졌구나."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어. 어어.. 너도! 라는 어설픈 말만 남기고 달아났다.
그 말을 듣고 언니는 뿌듯해하면서도 한참을 깔깔대며 웃었다. 그런 말을 왜 해! 정말 어색했었구나. 나는 그런 언니에게 한없는 애정을 느꼈다.
언니. 나를 구원해준 언니. 언니와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 내가 그 고시원 방에 쓰러져서 굶고 학교에 가지 않고 잠들지 않고 혹은 너무 잠을 많이 자면서 미쳐갈 때.
언니만이 나를 그 작은 고시원 방에서 끄집어 밖으로 끌고나가서 먹이고 혼내고 타이르고 이야기를 듣고 나를 어르고 달래줬지. 언니가 날 구해준 거야.
나는 언니에게 구원받았다. 나는 이제 사회에 받아들여진다. 그 사실이 정말 안락했다.
우리 모두는 조금씩 미쳐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서로를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씩은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문득 과거의 인연들을 전부 다시 만나서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그때의 너와 나, 우리를 둘러싼 상황에 대해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비정상적이고 이해할 수 없다는 말로 치부하고 싶지 않아.
이제 나는 사회에, 일반 규격에 맞는 사람이 되었으니 우리 차분히 이야기 나눌 수 있겠지. 나와의 만남을 너도, 너희도 꺼려하지 않겠지.
나는 내 인생에 스쳐지나간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며, 그들 전부와 하나하나 차분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정신이 오염되고 낡지 않은, 어딘가 순진하고 엉성한 구석이 있는.
그때의 나는 순결한 정신 이상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