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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구 Dec 02. 2022

세상에 맞설 수 있는 한
내 힘은 가공할만하다

영화 <마틴 에덴>

영화 <마틴 에덴>은 동경하는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에게 건네는 쓸쓸한 인사입니다. 

1935년 10월 1일에 개관해 국내에 유일하게 남은 단관 극장인 광주극장에서 <마틴 에덴>을 상영한다는 소식에 찾아갔습니다.

2020년에 나온 영화 <마틴 에덴>은 잭 런던의 1909년 소설 『마틴 에덴』의 내용을 각색한 영화입니다.


세상에 맞서 자유를!

영화는 선박 노동자였던 마틴 에덴이 우연한 기회로 상류층 가문의 딸 엘레나와 사랑에 빠지며 시작합니다. 사랑은 아이와 같습니다. 모든 것이 새롭고 입에는 계속 '왜'라는 질문을 달고 삽니다. 내가 곧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일 겁니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마틴은 엘레나를 바라보며 고백합니다.


 “오직 당신처럼 말하고, 당신처럼 생각하고 싶어.”


그리고 조금 우습게도 마틴은 엘레나처럼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때는 그랬나 봅니다. 잡지에 원고가 실리면 고액의 원고료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부럽습니다. 지금은 아무리 열심히 신문에 글을 기고해도 건 당 오만 원 받으면 다행이다 하는 세상인데....!


영화 후반부에 마틴 에덴은 그의 꿈처럼 작가로 성공합니다. 가난한 남자라는 집안의 반대를 뿌리치고 엘레나도 마틴을 찾아옵니다. 이 순간, 마틴 에덴은 과연 행복할까요? 마틴은 그리워했던 엘레나를 만난 후, 창가 너머로 자신의 환영을 보게 됩니다. 마틴은 홀린 듯 그 환영을 쫓아 거리를 뛰쳐나갑니다. 이 환영, 자세히 보면 우린 한 번 본 적 있는 모습입니다. 바로 마틴이 처음 엘레나를 만나 책을 읽기 시작한 순간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 첫 순간 지점을 작가가 된 마틴이 다시 만난 것입니다. 과연 자신의 환영을 따라간 그는 무슨 말을 해 주고 싶었던 걸까요? 그의 운명은 영화 서두에 그의 글에서 어쩌면 나타났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나보다 강하다. 그 힘에 맞서 내가 가진 건 나 자신 뿐이지만, 어찌 보면 그건 대단한 일이다. 다수에 짓눌리지 않는 한 나 역시 하나의 힘이며, 내 글의 힘으로 세상에 맞설 수 있는 한 내 힘은 가공할만하다. 왜냐하면 감옥을 짓는 자는 자유를 쌓는 이보다 자신을 표현할 수가 없다.”


<마틴 에덴> 샤를 보들레르

영화에서 마틴 에덴이 보는 책 중 명확히 나타나는 책은 두 권입니다. 하나는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고 또 하나는 허버트 스펜서의 『제일원리』입니다. 마틴 에덴이 엘레나를 만나고 상류층의 삶을 꿈꿀 때 만나는 책이 『악의 꽃』이며 작가의 삶을 고민할 때 만나는 책이 『제일원리』입니다. 따라서 영화의 서사는 샤를 보들레르가, 그 서사 속 마틴의 행동은 허버트 스펜서가 결정한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영화를 보면 『악의 꽃』 중 「여행」의 서사가 마틴의 서사와 닮았단 생각이 듭니다. 여행을 꿈꾸는 아이에게 온갖 여행을 마친 자가 대화하는 형식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도와 판화를 사랑하는 아이에게  우주는 그의 광막한 식욕과 맞먹는다.  아! 세계는 등불 아래서 얼마나 큰가!  추억의 눈에 비치는 세계는 얼마나 작은가!”


마틴은 처음 엘레나를 만나고 그녀의 집에서 본 모든 것을 동경합니다. 마치 그는 그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 여행자와 같습니다. 그런 그에게 루스 브리센덴이라는 노년의 신사가 나타납니다. 「여행」 시에서 여행을 꿈꾸는 아이가 마틴이라면 루스 브리센덴은 여행을 마치고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인입니다.  시에선 노인은 아이에게 여행의 평범함, 나아가 여행 이후의 지루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화에서도 글로 성공하겠다는 마틴에게 루스 브리센덴은 ‘진짜 기자’를 보여주겠다며 어느 신문사로 마틴을 인도합니다. 도착한 신문사, 마침 신문 기자는 기사의 제목을 적고 있습니다. 기사 제목은 ‘암살의 시대’. 마틴이 꿈꾸고 동경하는 부유한 세계에선 고용주가 반기를 든 노동자를 살해하고 있었습니다.「여행」에 나오는 여행자가 마지막에 모든 것에  ‘지겹다’고 표현한 것처럼 루스 브리센덴은 사건의 진실과 환상의 경계로 마틴을 몰고 갑니다.


여행의 끝은 언제나 아름다울까?

마틴이 서 있는 세계는 고용자와 노동자가 대립하는 세계입니다. 그는 그 사회 속에서  스펜서의 『제일원리』를 탐독합니다. 그리고 그는 개인주의자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그는 사회주의자에겐 자유주의자의 노예라며, 엘레나 가족에겐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찍혀 외면당합니다. 그가 도달하고 싶었던 세계에 마틴의 자리는 없습니다.  

엘레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싶다는 마틴에게 엘레나는 문법을 배우라고 했지만 문법으로 이뤄진 사회는 개인의 노력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곳은 오직 기득권층이 직접 문을 열어줘야 그들의 은총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마틴은 절망합니다. 이때 영화에선 슬퍼하는 마틴의 모습과 함께 배가 가라앉는 푸티지 영상이 함께합니다. 그 무너지는 배는 마치 「여행」에서 돛을 달고 여행을 떠난 여행자의 말로를 보는 것 같습니다.


자유가 꺾인 세상은 감옥

영화 마지막 30분은 작가로 성공했지만 괴로워하는 마틴을 보여 줍니다. 이제 그의 글은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 모두에게 읽힙니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그의 글을 소비할 뿐입니다. 목적지를 잃어버린 마틴은 사회 속에 휩쓸린다. 작가로 성공을 이뤘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마틴이 상상했던 곳이 아닙니다. 그가 쓴 글은 오히려 자신이 쌓는 감옥이 되어버립니다. 자신의 의도는 철저하게 대중 입맛에 맞게 각색됩니다. 

보들레르의 「여행」은 이렇게 끝난다. 


“저 심연의 밑바닥으로 빠져들기에 지옥이건 천국이건 무슨 상관이냐? 모르는 것의 심연에서 새로운 것만 찾아낼 수 있다면.”


보들레르 시 속 여행을 끝낸 자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찾지 못하고 절망합니다. 세상은 지겹다며 ‘죽음이여 어서 오라’라고 외칩니다. 더 나은 것을 찾아 떠난 여행이지만 그곳에도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유로부터 벗어나려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에리히 프롬은 이런 자본주의 사회 문제를 지적하면 개인이 실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틴 에덴이 영화 초반부에 썼던 글을 상기하면 개인이 사회 속에서 실존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아픔이 존재할지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글의 힘으로 세상에 맞설 수 있는 한 내 힘은 가공할만하다."


다시 마지막 환영을 쫓는 마틴에게로 가봅시다. 과연 마틴은 환영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을까요.

우리는 항상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합니다. 저 너머엔 새로운 것이 있을 거란 희망에 찬 상태로 말이죠. 그러나 언제나 여행이 즐겁게 끝나진 않는 법입니다. 그 간단한 사실이 가끔은 삶을 슬프게 만들기도 합니다.

광주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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