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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문하는 임정아 Apr 16. 2024

엄마도 흔들리며 큰다

엄마와 딸

1장. 2남 2녀 중 셋째로 산다는 것

1. 아버지는 뱃사람

얼마나 잠이 들었던 걸까? 두런두런 말소리에 눈을 뜬 시각 ,방 안을 둘러보니 아직 깜깜하다. 마루에서 마당으로 다시 마루에서 방으로 엄마 아빠 목소리가 겨울바람 소리를 가르며 들려온다. '아빠한테 인사를 해야 하나?' 어제저녁 먹은 멸치회 이었을까? 슬슬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눈 비비고 마루로 나서 보니 발이 시리다.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나서고 대숲을 지나야 나오는 변소까지 갔다 올  생각을 하니 어느새 배 아픈 게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까치발을 하고 아버지뺨에 뽀뽀를 하고선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깜빡 잠이 다시 들었다 싶은데 누군가 흔들어 깨운다.

"정아,  아버지 잠바 갖다 주고 온나 . 이 추운데 잠바를 안 갖고 갔네. "

잠결에 양말을 대충 씻고 부리나케 선착장으로 뛰어간다. 윙윙 귀신 바람 부는 대숲을  달려 우체국을 지나 선착장 끄트머리에 도착하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다행히 아버지가 탄 배가 출발하지 않고 있다.

찰랑거리는 파도 소리, 뱃사람들의 바쁜 움직임 속에서 사촌 오빠가 보였다.

"오빠, 이거 아버지 거."

" 추운데 여기까지 뭐 하러 왔노?"

 아빠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는데 사촌 오빠는 무심하게 잠바만 받아 들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한 달 뒤에는 아빠를 볼 수 있겠지? 3월까지 멸치가 잡히는 시기라 아빠가 탄  창선호  뒤로 다른 배들도 흰 물살을 가르며 큰 바다로  나갔다.


 가마솥뚜껑이 아궁이에 걸렸다. 기름을 두르고 '지지직' 호박전에 구워지고 있다. 창일 할매 집에 오늘도 온 동네 아지매들이 모였다. 불가에 앉아  웃음 꽃 피우는 할매, 성록이 아지매,성룡이 고모 , '용기네' 불리는 우리 엄마까지 .

처마 끝에서 마당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손으로 받아내며 코끝으로 고소한 냄새가  솔솔 들어오는 걸 즐긴다. 할매는 엄마 따라온 나에게 가끔 눈치를 주지만 호박전이 구워지면 바삭한 가장자리를 쭉 찢어 맛보라고 건네주실 때는 정겹기만하다.

"아지매요,  들어왔으예"

 대문밖에서 누군가 들뜬  소리로 소식을 전한다. 너나 할 거 없이 젓가락을 놓고 각자 집으로 뛰어간다. 좁은 골목길에 보슬보슬 내리는 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른들이 앞장서고 뒤따르던 나만 우산을 썼다. 한 달 만에 오는 아버지가 반가운 것인지 아버지 손에 들린 산도가 반가운 것인지. 엄마를 따라 집으로 달렸다. 동생이랑 둘이서 산도를 꺼내 입에 불고 엄마가 가마솥에 물을 데우면 장뚝대로 더운 물을 나르고 아버지는 몸을 씻고 피곤을 털어낸다. 내 고향 칠천도는 10개의 마을이 있는 작은 섬이다. 30분마다 한 번씩 페리호가 사람도 실어 나르고 자동차도  실어 날랐다. 그 페리호가 정박해 있는 첫 동네가 우리 마을이다. 마을 남자 어른들은 대부분 멸치 잡이 배를 탔다.  아버지도 그러했다. 여름에 선주와 계약을 하고 가을이면 배를 타고 나갔다. 빠르면 한 달에 한 번,  오래 걸릴 때는 두 달에 한 번 집에 들렀다. 아버지가 없는 동안은 큰오빠가 아버지 역할을 했다. 지금도 아버지보다 큰오빠가 좀 더 어렵다. 엄마는 아버지를 대신해 소를 키우고 논일 밭일을 해야 해서 장화를 신고 낫을 든 엄마의 모습이 기억에 가득 차 있다.   배를 타고 나가신 아버지는 한달에 한번 저녁 무렵 집으로 오셔서는 다음날 새벽 일찍 또 집을 나서야 했다. 아버지 정이  늘 그리웠다.  빠를 무서워하면서도  따르고 좋아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큰집 제사를 마친 새벽, 잠이 오면 아버지 등에 업혀 집으로 오곤 했다. 오빠들이야 다 자랐다고 하지만 아래로 여동생이 있었어도 아버지 등은 늘 내 차지였다. 아버지의 등이 따뜻해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개짖는 소리에 깼다가   다시 또 잠이 들고 했던 그 숱한 날들을 기억한다. 살면서 힘이  때 사람들은  누군가의 '어깨를 빌린다'는 표현을 쓴다. 나는 지금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남편의 등을 빌린다. 아버지의 따스한 등에서 세상 하나도 무섭지 않고 유년을 보냈듯 지금은 남편의 등을  빌려 아무리 큰 일이  닥쳐와도  가족의 위로와 응원이 있으면 두렵지 않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가  예닐곱 살쯤 되었을 무렵이니 아버지는 마흔 두셋 젊은 시절이지 싶다. 아들 둘을 낳고 처음 얻은  딸이니 예뻐하셨고 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많아서 더 특별하게 아끼시는 듯하다. 뱃길 나갔다 돌아오셔도 늘 내 이름을 부르고 마당으로 들어섰고 양손에 들린 도와 군것질거리도 다 내 손을 거쳐 오빠들과 동생에게 갔으니까. 아버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이 사회성이 좋고 리더십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성격 좋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아버지의 사랑 덕분인가 보다 .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 간 적이 있다. 외갓집에 다녀오느라 아버지와 둘이나 나선 길이었다. 여객선을 타고 갔다가 여객선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접안시설이 좋지 않아 바닷가에 신진호(부산과 거제도를 오가던 여객선)가 서 있으면 작은 배로 이동해서 신진호에 올라야 했다. 아래를 쳐다보면 시커멓게 집어삼킬 듯 푸른 물이 넘실대고 바람이 불어 사다리는 흔들리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어도 겁이 덜컥 났다. 부산 가서 맛있는  우동  사준다는 말에 용기를 내어 사다리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배표를 끊으러 간 아버지가 우유와 빵을 사주셨다. 어찌나 고소한 냄새가 나는지 먹기 아까워서 한참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병에 든 우유를 다 마시고 나면 빈 병을 반납해야 했다. 빵은 아깝고 우유도 빵이랑 먹어야겠고 가게 아주머니는 우유를 얼른 마시고 빈병을 달라고 재촉 하지. 머릿속이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아버지가 표를 들고 오고 뱃고동 소리가 났다. 곧 배가 출발해야 하니 얼른 우유를 마시라고 아버지도 한마디했다. 마음이 더 급해졌다. 이것저것 짐을 챙긴 아버지가 내 손을 잡아끌었을 때 나는 우유가 그대로 둔 우유병을 바다에 빠뜨렸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우유가 아깝고 그렇다고 마실 수는 없고 내가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우유병을 물에 떨어뜨리 것이다. 아버지는 그때도 '할 수 없지 괜찮다. 다음에 또 사줄게 '

딱 그  말뿐이었다. '왜 그랬냐 아깝지 않냐'는 추궁은 없었다. 아버지한테서  나는  멸치 비린내가  나는 좋았다.  손가락 마디마디 군살이 박히고 거뭇거뭇톱으로 딸기맛 산도를 내밀던 마흔셋 아버지가 그립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아버지를 뵈러 칠천도에 간다. 요즘도 소도  키우고 고추농사를 짓는 아버지. 새벽에 일어나 저녁 늦시간까지 한시도 쉬지 않는 부지런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가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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