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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문하는 임정아 Apr 17. 2024

일곱 살 살림꾼

엄마가 온다 엄마가 온다

벌써 열밤이 지났다. '엄마가 온다 엄마가 온다. 오늘은 엄마가 온다.'아궁이 앞에 앉은 나는 성냥불을 그어 그 불이 꺼질 때까지 소원을 빌었다. 다 탄 성냥이 고개가 꺾여 부러지지 않고 붙어 있으면 엄마가 온다고 믿고 또 믿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성향은 고개가 부러졌다. 아궁이 속 장작은 작은 소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타닥타닥 잘도 탄다.


엄마가 부산 외갓집에 작은 오빠를 데리고 간지 열흘 밤이 지났다. 눈물이 핑 돌았다. '역시 엄마는 나보다 더 오빠를 더 좋아하는 거야.' 부지깽이로 장작 끝을 아궁이 안으로 잘 밀어 넣고 부엌을 나와 마루에 올라섰다. 엄마가 잘 삶아서 한쪽에 개 놓은 수건이랑 걸레는 벌써 다 썼다. '세수도 깨끗하게 하고 마루도 윤이 나게 반질반질 잘 닦아 놓으면 엄마가 더 일찍 올 거야. ' 아침에 눈뜨면  꼬박꼬박 세수하고 손목이 아파도 열심히 마루를  닦았다. 안방 문고리를 열고 가만히 장롱 앞에 섰다. 코끝 이 찡하다. 일바지에 코를 묻었다. 엄마가 벗어두고 간 바지. 엄마 냄새가 난다. 울음소리는 안 난다. 너무 슬프면 가슴속에 또 하나의 내가 웅크리고 울음을 운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 보면 저녁도 굶고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다. 작은 오빠는 어려서부터 아팠다. 엄마한테 오빠가 왜 아프냐고 물으면 포구 나무에서 떨어졌다고 했다가 개울에 빠져서 그랬다고도 했다. '그렇구나. 지금도 개구지니까   어려서는 더 심했겠지 그때도 별났구나' 이해가 됐다. 그런데 추석이 지나고 설이 지나도 아픈 다리는 그대로였다. 왜 빨리 낫지 않는 거지? 어린 나이에게도 걱정거리가 생겼다. 어떤 날은 동네 친구들이 놀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살구 받기'를  하다가도 '깡통 차기'를 하다가도 집으로 들어왔다. 그 당시에는  실력이 있기로 유명했던 대구 동산병원으로 충무(통영) 견내량으로 오빠를 데리고 다니던 엄마는 외갓집이 있는 부산으로 갔다. 어떻게든 더 늦기 전에 오빠를 낫게 하고 싶어 하던 간절함이었다. 일곱살 나는 집안 살림을 도왔다. 가마솥에 밥을 짓느라 불쏘시개가 젖은 날은 눈이 시리고 맵도록 불을 지폈다. 부지깽이 끝이 타서 새까매지면 부엌바닥에 엄마 얼굴을 그렸다. 동그란 얼굴에 쌍꺼풀이 있는 엄마 얼굴,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그리고 또 그렸다. 그러면 또 눈물이 났다. 부지깽이로 부뚜막을 두드려도 보고 장작 더미를 발로 차기도 했다. 아빠는 엄마가 집에 올 때 예쁜 원피스를 사 올 거라며 나를 달랬다. 원피스는 하나도 필요 없다고. 당장 엄마를 데려오라고 소리쳤다. 달이 뜨면 달님한테 빌었다. '엄마가 빨리 집에 오게 해 주세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달님은 아시죠? 엄마한테 내 목소리 들리게 해 주세요.' 엄마가 오면 집안일은 다 내가 해도 상관없다고 고양이  밥도 잘 챙기고 강아지 밥도 안 빠뜨리고 잘 챙길 수 있다고 말이다. 그래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개울가에 걸레를 빨러 나갔다.  종갓집인 큰집은 앞마당이 네모 반듯하고 높은 대청마루가 있고 뒷마당에는 감나무 대추나무 배나무 없는 게 없었다. 큰집 바로 앞에는 폭이 넓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개울가에 사람이 엉덩이 붙이고 앉기 딱 좋을만한 넓은 바위가 있고 그 옆에는 빨래를  비벼서 빨 수 있는 작은 돌이 있어 빨래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언 손을 비벼가며 걸레를 빨고 있는데 성복이 아지매가  말을 걸었다.

"아이고 손도 시린데 집에서 따신 물 데워서 씻지 여기까지 왔나?엄마는 아직 집에 안 왔나? "

 "몰라요. 우리 엄마는 새엄만가 봐요. " 심술이 올라와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아지매도 당황하셨는지 더 묻지 않았다.


부산배 신진호를 타고 엄마가 왔다. 예쁜 원피스는 없었지만 엄마가 와서 그저  좋았다. 또 갈 거냐 묻고 싶었지만 혹시나 진짜 다시 가버릴까 봐 그날 밤은 엄마 손을  꼭 잡고 잤다. 들에 나갔다 온 엄마가 아궁이 불을 때다가 불렀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정아, 이리 와봐라.  니 엄마가 새엄마 같나?" 엄마 얼굴이 흐릿해졌다.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설프게 잠이 들 때 가위눌린 것처럼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내 입술이 말을 듣지 않고 파르르 떨리기만 했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듯 나를 안아줬다.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왜 그런 말을 했냐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엄마 손이 떨리고 어깨가 흔들렸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울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데 타닥타닥 장작불 소리만 부엌 안을 채우고 있었다.


엄마 나이 열두 살, 막내 이모 나이 여덟 살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단발머리 꿈 많은 소녀는 엄마를 하늘나라에 보내고 어린 여동생과 아버지, 셋이 남은 집을 지켜야 했다고 한다. 바지게도 지고 논에 거름도 내고 집안일을 도왔단다. 그 시절 머슴이 셋이나 되는 부잣집이었지만 안주인이 없는 집은 질서가 없었다.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물으면  주인이 직접 해야 하는 일도 있어서 이모 손을 잡고 논에도  나가고 밭에 나가서 직접 일을 도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엄마는 자식인 우리들보다 이모를 더 챙길 때가 있다. 섭섭한 마음이 들지만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해가 된다. 둘이서 여우울음 우는 겨울밤 화장실 다녀온 이야기며 할아버지가 멀리 외출한 날 밤에는 둘이서 잠 못 들고 밤을 새웠다고 하니 둘이 애틋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산과 들에 허옇게 억새 꽃이 피기 시작하면 학교 갔다 온 오빠들을 따라 나무를 하러 갔다. 어린 나는  솔방울을  줍거나 갈비를 긁어모으는 오빠 옆에서 자루를 잡아주는 역할을 맡았다. '갈비'는 잘 마른 소나무 잎을 부르는 말이다. 갈비나 솔방울은 장작불로 큰 불을  만들기 전 훌륭한 불쏘시개가 되어주었다. 신문지가 귀하던 시절이어서 아궁이에 갈비 한 움큼을 넣고 그 위에 솔방울을 올리고 성냥불로 불을 지피면 불이 잘 피어올랐다.


고현 시내에 사는 작은 이모가 놀러 오셨다. 마침 엄마는 들에 나가고 없고 점심때가 조금 지났는데 버스를 타고 오느라 식사를 안 했단 말에 밥상을 차렸다. 엄마가 끓여 놓고 간 김치찌개에 내가 만든 계란말이를 놓았다.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야무지기도 하지." 이모가 해준  칭찬이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른인 이모가 알아서 먹어도 되고 엄마를 기다려도 되지만 그때부터 칭찬 듣는 걸 좋아했나 보다. 그때부터 요리를 좋아하게 되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호박볶음, 가지전, 시금치무침 엄마가 하는 요리를 다 따라 하기 시작했다. 요리는 손맛이라는데 제법 맛있다고 하니 더 신이 나서 매일 부엌에서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요즘도 여러가지  김치를 만들어 나누거나 손이 많이 가는 나물반찬을 계절마다 무치고  탕수육, 족발, 감자탕, 짬뽕, 육개장, 그리고 떡까지 직접 집에서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일곱 살 때부터 부엌살림을  도맡아 한 덕분이다.


 엄마는 아픈 오빠를 데리고 병원에 오래 있다 보니 끼니를 제때 챙기지 못했고 심한 위궤양으로 무즙을 자주 마시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엄마는 배가 고프다거나 식탐이 없다. 아침을 먹고 들에 나가면 저녁에 다 돼서 돌아오는 것이 습관 된 탓도  있다. 먹는 것에 관심이 없는 엄마와 오로지 잘 갖춰 먹는 것이 관심인 나는 자주 부딪힌다. 누가 옳다기보다 요리를 좋아하게 된 나와 그것이  애처로워 먹는 것에 더 무뎌진 엄마의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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