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것만큼 좋아하는 것은 남을 가르치는 일이다. 남을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게 된 것은 6학년 때 담임 선생님 덕분이다. 선생님은 정말 심한 수학 포기자였다. 오죽했으면 수학 시간에는 아예 칠판 근처에도 오시지 않았다. 작은 섬 시골학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수학 시간이 되면 칠판 앞에 서는 것은 나였다. 선생님이 준 교안대로 칠판에 적고 아이들에게 설명을 했다. 사실 재미있고 즐거웠지만 마냥 좋은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 시절에도 왕따는 있었으니까. 수학 시간에 선생님을 대신하고 평소에도 선생님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나를 여자 친구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는 시간이면 30분을 걸어서 집에 가야 하는데 육촌인 친구만 나와 같이 가고 나머지 친구들은 먼저 가기 일쑤였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은근한 왕따가 있었다.
통학선을 타고 면 소재지에 있는 중학교에 가던 시절이었다. 바지선이라 불리던 카페리호가 있긴 했지만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가야 했기에 통학생을 놓치면 지각했던 시절, 하루는 통학선을 기다리고 있는데 수민이가 쪽지를 건넸다.' 우리 오늘부터 너랑 안 논다'. 이유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첫날은 혼자 통학선에 오르고 내리는 게 마음에 걸리고 다른 학년 언니 오빠를 보기에도 창피했다. 둘째 날도 동네 친구들이 모두 나를 모른 척하고 없는 사람 취급하기에 나도 모른 척 지냈다. 셋째 날이 되니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저러나 싶었다 .넷째 날이 마침 토요일이라 직접 찾아가서 물어보기로 했다. 우리 동네는 안모실, 나루끝, 목넘에, 목 네 군데로 나뉘어 있었다. 안모실부터 친구를 만나러 갔다. 순정이, 미숙이, 정자까지 찾아가 이유를 물었다. 그냥 모른다고 했다. 이쯤 되고보니 짐작이 갔다. 왕따를 시키자고 말한 건 분명히 수민이다. 나리 끝으로 갔다. 수민이는 수돗가에 앉아 빨래를 하고 있었다 . 왜 나와 놀기 싫은지 물었더니 그냥 내 말투가 기분 나쁘다는 게 다였다. 월요일이 되어서도 바뀐 게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3학년 언니인 미희 언니에게 가서 하소연을 했다. 언니는 의리 있는 성격이라 모른 척할 것 같지 않아서였다. 다행히 언니가 내 편이 되어 주었다. 그날 이후 불편한 마음도 사라지고 오히려 학교에서 친구들을 만나도 통학선에서 마주쳐도 내가 먼저 모른 척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친구들도 생각이 바뀌었는지 점심시간에 먼저 찾아와 사과를 했다. 가르치려는 말투가 싫고 잘난 척 안 했으면 좋겠다는 게 이유였다. 말투는 그렇다 치고 잘난 척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서로 화해하기로 했다. 사실 내 마음은 속 시원히 욕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문디 가스나들, 너거는 뭘 그리 잘했는데? 친구가 돼 가지고 대놓고 따돌리고 너희 같은 친구는 나도 필요 없다'속으로 백번도 더 말하고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소수이고 그들은 다수인 것을.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란 걸 그때 배웠다.
지금은 중국에 사는 친구가 있다. 멀리 있어 자주 볼 수 없지만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교까지 친한 친구였고 한국에 들어오면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다. 하얗고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금테 안경을 낀 귀엽고 예쁜 얼굴. 공부도 곧잘 해서 선생님한테 귀여움을 받는 대신 동네 친구들은 이 친구를 시기했다 .그날도 수업을 다 마치고 종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따라 교실이 너무 조용해서 심심해하고 있는데 앞줄에서 종이 한 장을 넘겨 주었다. 미진이에 대해 나쁜 점을 적으시오. 친한 친구라 살짝 당황했지만 순간 재밌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내 안에도 작은 악마가 있었나 보다. 이미 서너 명이 미진이에 대해 낙서를 하고 비난의 글을 적은 것이 보였다. 장난기가 발동해서 친구의 이름으로 말장난을 했다. 색깔있는 볼펜을 써서 제대로 눈에 띄게 말이다. 그렇게 46명이 있는 교실에 종이를 한 바퀴 돌렸나 보다. 대여섯 명이 그 친구에 대해 낙서를 했다. 그 종이는 사분단 앞자리에 있던 미진이에게 전달되었다. 엎드려 우는 미진이가 보였다. 순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드르륵 교실 앞 문이 열리고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반장인 옥선이가 선생님께 여차저차 사건의 전말을 다 일러바쳤고 종이에 낙서를 한 모두가 불려 나갔다. 친구를 놀리는 우리가 맞을 거란 예상은 빗나갔고 선생님은 울고 있는 미진이를 불러내서 종아리를 때렸다. '딱' 아 그때의 기분이란? 놀림을 당한 애가 무슨 죄라고 우리도 양심이 있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선생님은 못된 장난을 친 우리에게 보란 듯이 계속 매질을 했다.' 네가 얼마나 친구들에게 밉보였으면 이런 일이 생겨?'
" 잘못했습니다 선생님."결국 선생님은 우리 모두에게 호된 꾸중과 회초리 세례를 퍼부었고 그날 우리는 통학선을 놓쳤다. 선생님 집에서 나란히 엎드려 선생님이 발라주는 안티푸라민 냄새를 맡으며 콧물 눈물이 범벅이 되어 먹던 볶음밥과 미역국 맛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아주 끈끈한 사이가 되었다.
(저기 아주 신난 표정의 아이가 그 시절의 '나'이다. )
중학교에 가서 받은 가장 큰 충격은 나는 진짜 섬 아이라는 사실이다. 말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 신세였다 .초등학교는 6년 내내 한 반밖에 없어서 친구를 새로 사귈 필요도 없고 선생님도 한 분이니 편했다. 내가 알던 연구국민학교는 이제 없었다. 중학교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국어 선생님 수학 선생님 과학 선생님 다 다르고 친구들도 열 개가 넘는 초등학교에서 모여서 누가 누군지 몰라 한 학기는 넋을 놓고 지낸 시간이었다. 마치 고요하던 바다가 태풍이 불고 난 뒤 한번 뒤집히듯이 정신을 쏙 빼놓는 기분이었다. 태풍 뒤엔 고기떼라도 남지만 나의 중학교 생활은 하루하루가 뒤죽박죽인 느낌이었다.
아이들과 책을 읽고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별일 아닌 일로 싸우기도 하고 서로 토라져서 불편해하기도 한다. 글을 쓰기 전 경험 나누기를 하다 보면 학교에서 아직도 왕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선생님 흉을 보는 아이 ,친구 험담을 내놓고 하는 아이, 학교에 대한 불만도 다양하다 .그럴 때마다 내가 겪은 이야기를 해 준다. '왕따도 결국은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다. 역지사지라고 내가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면 얼마나 억울한지 알게 된다 '내가 남보다 조금 낫다고 우쭐해하거나 상대가 조금 부족하다고 얕잡아 볼 일도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는 더욱 객관적인 눈을 가져야 한다. 우물 안 개구리는 온 세상이 그저 우물만한 크기이다. 우물 밖에 얼마나 어마어마한 세상이 펼쳐져 있는지 상상조차 못 한다.그 좁은 세상에서 만나는 인연들과 다투고 미워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건 긴 인생에 얼마나 아까운 시간들인가? 나를 돌아보고 내가 정한 우물에서 벗어나 바다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세상은 넓고 인연은 많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내가 속한 세상의 크기가 달라진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 청소년기에 소중한 친구와 소중한 시간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먼저태어 나서 먼저 그 길을 걸어본 사람으로서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친구문제로 가시밭길을 걷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혹시 맨발로 걷고 있다면 신발을 빌려주고 돌길을 걷는다면 그 돌을 치워 주고 싶은 선생의 마음 ,엄마의 마음, 어른의 마음으로 중학교 시절의 나를 ,지금 만나는 아이들을 응원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