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서울 소재 대학에서 생명정보학을 전공했어요.
생명정보는 생명공학과 컴퓨터공학을 섞은 전공이라 C언어, 파이썬 등등의 언어를 배웠어요.
이과 전공인데도 의외로 외국어 배우는 걸 즐겨했었는데 컴퓨터 언어도 외국어와 비슷해서 재밌게 공부했던 기억이 나요.
어떻게 마케터가 됐는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간략하게 제 경력을 짚고 넘어갈게요.
명품 B사에서 인턴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대기업 L사에서 온라인 마케터로 3년간 프로모션/이벤트 업무를 했어요. 그리곤 홈쇼핑 회사에서 모바일 편성을 담당하다 최근 스타트업으로 이직했습니다. 이커머스가 뭔지도 모르고 첫발을 내디뎠는데 벌써 12년 차 과장이 되었네요.
생명공학을 전공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연구원이나, 그 당시 한참 핫했던 의학대학원, 약학대학원을 준비했어요. 제가 전공한 생명정보학은 신생 학문이라 위로 선배가 두 학번뿐이고 거의 대부분 석박사를 준비했었어요.
학사 졸업 후 취업하려는 동기들은 보통 제약회사 영업분야를 목표로 해서 마케터를 준비하는 저는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형국의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준비 중이었어요. 스스로도 난 왜 이런 전공을 선택해서 이 고생을 할까 자괴감에 자주 빠졌습니다.
나름 생명정보학을 선택한 이유가 없었던 건 아니에요. 고등학교 때 생물 수업이 재밌었고 늘 100점을 맞았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실험실에서 오랫동안 앉아 DNA 추출 실습을 해보니 좋아하는 것과 실제로 해보는 것은 완전 다른 얘기더군요. 시간과 공을 들여했던 추출 결과에 DNA가 없었고 그게 나올 때까지 반복하는 게 연구원의 일상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안되는 걸 될 때까지 반복하는 것 제가 제일 못하는 것 중 하나였죠.
4년을 실험실을 들락날락거려도 미생물 배지 (미생물의 증식, 또는 배양을 목적으로 미생물이 일반적으로 생존하고 번식하는 자연환경과 유사한 영양 상태를 유지하도록 고안된 물질) 냄새는 익숙해지지 않더라고요.
나는 이 길과 맞지 않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반대로 1학년 때부터 마케팅 광고 분야가 참 흥미로웠어요. 알바와 과외를 뛰느라 복수전공은 꿈꾸지 못했고 대신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마케팅 서적을 다독했어요.
취업이 코앞에 다가왔던 대학 4학년 때는 부러 영문과 회화수업을 전부 수강하고 외국인 교수님들과 친분을 쌓았어요. 학교 취업정보센터 프로그램에 가입해 영문이력서와 한글 이력서 / 자기소개서를 계속 퇴고받으며 준비했습니다. 거짓말 안 보태고 100번넘게 방에 틀어박혀 지원서를 제출했어요. 그 당시 이력서에는 가족 주민번호와 출신학교까지 자세히 적어내야 했는데 얼마나 많이 썼는지 6명이나 되는 가족 주민번호를 툭치면 바로 튀어나올 정도였던 기억이 나네요. 가장 속상했던 편견은 '젊은이들은 대기업만 선호해서 중소기업은 지원도 안 한다'는 것이었어요. 중소기업에서 기회만 준다면 당장 가서 이 몸이 부서지도록 일할 각오가 돼있었는데 좀체 기회가 주어지지 않더라고요.
한 번은 유명 제지업체에 계약직 공고가 떠서 면접을 본 후 인사담당자가 제게 했던 가슴 아픈 말이 떠오르네요. '지원자분은 4년제를 나와서 계약직으로 뽑기에는 아쉬워서요.'
경영학과를 나오지 않아 마케팅 지원서는 다 떨어졌고 반대로 전문대가 아닌 4년제를 나와 계약직으로도 채용이 안됐습니다. 한 번은 양재동에서 1인 기업을 운영하는 사장님 회사에 지원해서 면접을 본 적이 있는데 영업사원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이 개발한 손전등을 지하철에서 팔아야 하는 것이었어요. 그날 면접이 끝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왜 대학생들이 미리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 전문직을 꿈꾸는지 깊은 깨달음이 오더군요.
해도 해도 실패만 경험했던 당시 제 인생은 이미 다 끝나 버린 것만 같았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 기간은 6개월도 안됐던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시로선 끝을 알 수 없는 긴 터널을 더듬어가며 걷고 걸었던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결국 졸업하자마자 취업하겠다는 야심 찬 꿈은 실패로 끝나버리고 강남역에 위치한 카페에서 알바를 하며 #취준생으로 살았어요. 가끔 카페를 스치는 이미 취업에 성공한 동갑내기 친구들을 손님으로 맞이하는 것은 심적으로 참 어렵더군요. 우연히 들려 마주치게 된 지인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안부를 걱정해주는 것조차 너무 싫었었죠.
'이럴 거면 상고나 갈 것이지 왜 대학에 갔는지 모르겠다'는 부모님의 모진 말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러다 알고 지내던 교회 언니가 대학원을 가게 되면서 본인이 근무했던 버버리코리아 본사 인턴직으로 절 추천을 해줬어요.
다른 그 무엇보다 인턴으로서의 열정과 영어를 자신 있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보셔서 생각보다 쉽게 면접에 통과했습니다. 급여는 88만 원 세대보다도 못한 세전 70만 원이었습니다.
사실 면접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았던 때라, 돈은 저에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회사가 어떤 곳인지 배우고, 경력을 쌓을 기회를 줘서 정말 기쁘고 감사했어요. 목에 사원증을 걸고 선배 언니들과 우르르 몰려가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것조차 기뻤던 기억이 나요.
본사가 청담사거리에 위치해서 사회초년생에겐 부담스러운 점심을 먹고 동료들 따라 브랜드 커피숍에 들러 커피 한잔 하고 나면 급여는 순삭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