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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더 R Nov 13. 2022

전화벨 공포증

불혹의 나도 변하다니...

 2008년 L사에서 인턴으로 업무를 시작해 올해 경력 14년을 채웠다. 당시 대학생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던 기업인 C사에 이직해 퇴직한 20년도까지만 해도 모든 동료들은 아날로그 전화기를 지급받았고 업무에 유용하게 썼다. 그런데 코로나가 한참 유세를 떨치던 20년도 3분기 이커머스 1위 기업인 D사로 옮겼을 때 아날로그 전화기를 지급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이직 후 약 한 달간은 불완전한 상태로 인수인계를 받아 혹여라도 실수를 저지를까 봐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D사는 코로나 전에도 1주일에 한 번은 재택근무를 복지로 제공하고 있었고 바이러스 확산을 축소하기 위해 20년도부터 #전면 재택근무를 실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입사한 첫 주에도 난 2번만 본사에 출근했다. 재택 하라고 멍석을 깔아줬음에도 죄짓는 마음으로 아침에 노트북을 켰던 기억이 난다.


 업무 인수인계는 모두 Zoom 미팅으로 해결했고 인계자의 문서와 가르침은 #화면공유 기능으로만 해결했다. 뭘 모른다고 질문을 하면 본사로 올래요?라고 친절한 구원의 메시지가 도착할 줄 알았으나 #wiki 링크들만 슬랙 창에 빼곡하게 날아와 박혔다. 아무도 내게 친절하지 않다고 느껴졌고 동료의 얼굴을 마주 할 수가 없었다. D사는 보안을 위해 회사 조직도 검색을 매우 불편하게 해 두었고 실제 나와 밀접하게 근무하지 않는 직원들은 이름이나 닉네임을 알지 못하면 검색하기가 매우 불편하고 어려웠다. 나와 일하는 협력 부서나, 같은 팀 동료조차 닉네임으로 불리다 보니 실재하는 사람일까 의문이 들기도 했고, 누가 누군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그래서 입사한 약 세 달간은 매우 우울했다.

그러나 이젠 슬랙으로 채팅을 하다 서로 이해가 안 가거나 의견이 안 맞을 때면 자연스레 슬랙에 있는 #허들 기능을 켠다. 사실 핸드폰보다 더 쉽고 빠르다.


 짧지 않은 14년이란 근속기간 동안 살짝살짝 회사 갑질을 경험해봤고 꼰대 선배들도 만나봤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네 탓이라며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던 차장님이나 대표가 막달이 임박한 임산부에게 재떨이를 날리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그 당시 인턴과정이라 눈앞에선 보지 못했고 고함소리로만 들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런데 이젠 D사에서 젊은 꼰대들을 만난다. 이직한 지 얼마 안돼 버벅거리는 나에게 5~6년씩 D사에서 근무한 젊은 선배님들은 나에게 느리다 평했고 한번 말해서 잘 못 알아듣는군요 라고 정말 쉽게 말했다. C사에서는 꽤 빠른 사람으로 인정받던 내게 정반대 되는 평가를 한 것이다. 당시 개인적으로 큰돈이 들어갈만한 힘든 상황에 놓여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멸시와 조롱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래서 납작 엎드리고 회의 전 미리 문서를 숙지하고 위키를 돌아보며 기능을 스스로 익혔다. 동료들에게 미리 알아보지 않고 선 질문하는 습관을 최소화했다. 근무한 지 1년이 지나고 나서는 스스로 획득한 정보들에 의기양양하며 구 멤버들에게 전파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보람스럽게도 그 시간들을 견뎌낸 후 '느리다'는 오명은 벗게 되었다.


독자들과 함께 놀라기 위해 미리 밝혀두자면 난 올해 불혹의 나이가 되었다. 그 부분을 참고하셔서 아래 글을 읽어보시길 권한다.


시간이 참 빠르기도 하지 모든 시스템이 생소하기만 했던 D사에 입사한 지 벌써 2년이 흘렀다.

그런데 이젠 철저하게 이곳에 적응한 내게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다.

    힘들기로 유명한 국내 유통사에서 이직한 MD들이 #대면미팅하자고 본사에서 보자고 하거나

    코로나 종식 발표 났는데 아직도 #재택근무하세요?라는 질문을 하거나

    성격 급한 유관부서 동료에게 별 시답잖은 일 가지고 퇴근시간 이후 전화가 오면  

심장이 어느새 발랑 발랄 뛴다. 그리곤'무례하네' 혹은 '성급하네' 하고 혼잣말을 읊조린다.


 D사에서는 비단 근무시간 중일지라도 개인 휴대폰으로 굳이 굳이 전화를 했다는 것은 사실 119를 부를 정도로 빨리 처리해야 할 시급한 오류를 발견했다는 정도의 사건이어야만 한다. 슬랙에서 대부분이 휴대폰 정보를 비노출 처리해 두었기 때문에 그 바쁜 와중에 일부러 나의 정보를 조직도에 검색해봤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사실 슬랙 채팅방에서 "저 이 부분이 정말 이해가 안 가서 그런데 전화해도 될까요? " 라던가 "오늘 저희 집 인터넷이 불안정해서요, 실례지만 R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도 될까요?"라고 사전에 양해를 구하고 정중히 의사를 물어봤을지라도 여전히 심장이 두근거리긴 한다.

 약 2년 넘게 비대면으로 근무를 하다 보니 14년의 경력이 무색하게도 대면을 하는 것이 심지어 전화 상으로 소통하는 것 또한 아직도 적응 안 될 정도로 불편하고 긴장된다.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거라더니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더 무서운 거였다. 단, 2년의 비대면 환경은 대면 근무가 너무도 익숙했던 12년 간의 나를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이래서 맹모가 삼천지교 했나 보다.


에필로그

입사한 지 한 6개월 되었을 때였나? 아무리 #쿼리 를 돌려도 분석 결과가 안 나오길래 화딱지가 나서 @here 라는 메시지를 약 6,000명이 모인 Tech Support 방에 남겼던 적이 있다. 외국인 비중이 꽤 높은 D사에서 영어로 욕 비스무레 한 것들이 #히어 글의 댓글로 마구 날아와 꽂혔다. 화난 이모티콘이 몇십 개 붙여졌다.

대충 요약하자면 '너 6천 명이 넘는 이방에 무슨 짓을 한 거야? 개념 상실했군 정말 무례해'


 C사에서 후배였던 동료가 그 방에 함께 있다가 내 무례한 @here 소환 글을 발견하곤 내가 불쌍했는지 진솔한 조언을 개인 슬랙으로 보냈다.

'R님, 히어 여기서 함부로 쓰시면 안 돼요. 6000명 모두에게 알랏메시지가 가기 때문에 엄청 욕먹습니다.'

그날 난 정말 D사에 업무시스템에 대해 제대로 배웠다. 아무리 급해도 무례하게 '히어'하지 말 것,

급한 건 나 혼자 일뿐... 메시지를 남기고 기다리면 알아서 담당자가 배정돼 순차적으로 일처리를 해줄 것이란 것을 믿고 담담히 기다릴 것

그 당시에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2년이 흐른 지금의 나는 절대적으로 그들이 왜 화가 났는지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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