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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더 R Jul 03. 2024

왜 불편했을까?

선 넘는 사람들

그러고 보면 맹목적으로 사립초에 보내야만 한다는 목표를 세웠던 것은 중학교에 딸을 막 입학 시켰던 회사 상무님의 소회 탓이었다.  

사립초에 딸을 보내놓으니 신경하나 쓸 것 없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어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는 말이 마음속 깊이 박혔다.  

코로나가 터지고 맹종은 더 견고해졌다. 코로나에 걸려도 줌수업으로 바로 대체가능했다.

게다가 오랜 시간 학교에 있을 수 있고 심지어 안전하게 셔틀버스 타고 등하교를 하다니... 때마침 집 앞의 학교는 가장 피하고 싶었던 혁신초, 보내야만 할 충분조건이 됐다. 등교 몇 주간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분명 친구들도 선배들도 좋은 사람들뿐일 거야?' 공립에 비해 심하게 비싼 등록금은 그 착각을 아름답게 포장시켜 줬다.    


한 달이 흐르고 나서 의외로 힘들었던 것은 매일 등하교 시 셔틀버스 태우러 나가는 하루 두 번 20분 남짓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정류장에서의 어색한 마주침이 사실 제일 어렵고 불편해 피하고만 싶었다. 그래서 자주 한국말 서툰 남편을 깨워 대신 내보냈다.   

안면은 텄지만 친하지도 않은 그 애매한 경계, 아이들이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수다를 떨면 그나마 나은데 서로 삐치거나 다퉜거나 아이가 먼저 인사해도 받아주지 않거나 할 때는 그 기다림의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지고 하루종일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생각의 늪에 빠져든다.'

  

  MBTI를 여러 번 검사해도 여전히 E성향이 찍히는데 그곳에 나오는 부모님들도 실은 다 그렇지 않을까 자위하며 여전히 부족한 사회성을 자책했다. 공립초로 전학 온 지 반년이 흐르고 나서야  큰아들을 사립초에 보낸 3학기 동안 왜 상대적으로 불행하고 불안했는지 하나씩 깨달아가고 있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물리적 환경이 변하고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사실 첫인상부터 이상하게 불편한 사람이 있지 않나? 그런데 매일 두 번 셔틀버스 정류장에서 버스가 올 때까지 어떻게든 서로를 버텨야만 했다.

묻고 싶지 않은 안부를 묻고 듣고 싶지 않은 것들을 들어야만 했다.


1700여 세대가 사는 우리 아파트에서 아이가 배정됐던 사립초에 1학년은 단 세명뿐이었다. 한 아이 어머니는 늘 지각을 했고 독고다이였다. 자연스레 우리 집은 나머지  한 아이의 가족과 자주 만나게 됐다. 그 집의 아빠와 시아버님은 키가 둘 다 180cm이 넘는 장신이다. 고개를 쳐들고 듣다 보면 목에 담이 오나 싶을 정도로 과하게 말이 많으셨다. 아무리 표정으로 '이제 그만 헤어지시죠'라는 신호를 보내도 말이 끊길 듯 말 듯 이어져서 계획보다 오래 그분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게 됐다. 전생에 말 못 하다 죽은 귀신이 들려붙었나 보다. 주로 얼마나 아내와 당신이 지극정성으로 손주들을 돌보는지 그런 이야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농담 던지듯 선 넘는 질문을 했다.


"설마, 입양된 건 아니지? 아니 어떻게 부모님이 한 번을 안 오셔?"


그렇다. 사실이다. 같은 서울하늘아래 살면서 매정한 친정 부모님은 이사 왔을 때 딱 한번 빼고 일부러 온 적이 없다. 스스로도 속상했던 지점이고 지금도 여전히 이해가 잘 안 간다. 어쨌든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어쩜 저런 질문이 이토록 천연덕스러울까? 정말 고아였음 어쩔라고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큰 아이를 자주 챙겨주시기도 했는데 어르신을 오해하나 스스로를 나무라기도 했다. 악마와 천사가 싸우듯 감정이 오락가락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 댁 어른들은 나의 아킬레스를 골라 시어머님 한번 시아버님 한번 사이좋게 펀치를 퍽퍽 날려주셨다. 그럼 주말 내내 그 말들을 곱씹고 곱씹다가 K.O 당하기 직전에 겨우 일어선다. 그다음 주 다시 하굣길에 만나면 또 약 펀치를 탭탭 맞고 쓰러졌다 일어서는 나날들이 계속됐다.

바보같이 무엇이 마음을 좀 먹고 있는지를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사실 그분들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지만 첫째 등하굣길, 둘째 어린이집 등하원길 동선이 계속 마주치는 바람에 속절없이 물리적인 환경 안에 갇혀버렸다.


그리고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 할 동네 X 사립초 모임

비싼 사립초 수업료에 보탬이 되고자 아이 교복을 당근으로 거래했었다. 그렇게 아파트 단지 내에 사는 당시 4학년 어머님과 얼굴을 트게 됐는데 본인은 학교에서 위원회를 할 정도로 상황에 참 밝다며 그분 주도로 동네에 아이학교 엄마들 모임이 생겼다.

모두가 말리는 학부모 모임에 자발적으로 가입하다니 내 무덤을 내가 판 꼴이다.

사실 말이 재택근무지 집안에 콕 박혀 일만 하니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당최 알 수가 없어 아이를 향한 죄책감 반 기대감 반으로 시작하게 됐다. 소중한 반의 반차까지 내고 처음 별다방에서 2,3, 4학년 어머님들을 뵈었다. 그들과 함께 했던 1시간이 흐르자 피곤함이 몰려오며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학교가 이렇게 흘러가서는 안된다는 둥, 우리가 다 같이 힘을 합쳐 책걸상 바꾸자고 목소리를 내자는 둥 , 이 선생님은 절대 걸리면 안 되고 저 선생님은 뭐가 이상하고 블라블라 원어민 선생님은 문제가 많다는 둥 좋은 말도 있었지만 비난의 말도 반 이상 들었기에 머리가 터져버릴 것 만 같았다.   

당장 아이 저녁은 뭘 먹여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기에도 벅찬데 학교 책걸상을 바꾸자며 한 목소리를 내자니 이게 뭔 소리고?

사립초는 교육청 지원이 제한적이고 모두 학부모님 호주머니 돈으로 경영을 하다 보니 오히려 공립초에 비해 눈치 보고 신경 쓸게 이렇게나 많았다.


그렇게 내 맹종은 하나둘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개인사정상 공립초로 아이를 전학 보낸 뒤 벗어날 수 없었던 물리적 환경에서 마침내 떠날 수 있었다. 더 이상 불편한 부모님들을 만나지 못하게 됐다. 공립초는 반도 9반까지인 데다 등하교를 아이혼자 하니 만나려야 만날 수가 없다. 그게 필요한 거리 두기인지 잘 몰랐었다.

이젠 모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 데리러 나갔다가 끝까지 아이와 놀고 있는 아이의 부모님과만 눈인사를 가볍게 한다.

아이들이 이미 친하니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아이가 재밌게 놀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 대부분 부모님도 괜찮을 확률이 꽤 높았다.


왜 4학년 어머니를 만날 때마다 불편했는지 최근에 알게 됐다.

남편이 원어민이라 아들의 스피킹과 리스닝실력은 배우지 않았어도 중간정도는 되는데 일에 치여서 파닉스를 다 못 떼고 학교에 보내야만 했다.

집에서 겨우 CVC letter까지만 끝내서 보낸 뒤라 학교에서 제공하는 파닉스 수업에 등록하고 영어 반도 가장 낮은 반에 배정해 달라고 요청을 넣어둔 터였다. 1학기가 지난 어느 날 그 4학년 어머님과 커피 한잔을 하면서 그분의 푸념을 듣게 됐다.

"우리 학교 나름 영어 특성화 학교인데 이번 신입생들이 글쎄 파닉스도 안 끝내고 온 거야 그래서 개교이래 최초로 파닉스반이 생겼잖아, 엄마들 수준차가 극과 극이야 학교 수준 떨어지게"

그 말을 듣는데 큰아이가 파닉스반을 수강했던 걸 알고 말씀하시는 건지 눈알을 엄청 굴렸다. 그렇게 사랑하시는 학교의 격을 떨어뜨려서 신입생 대표로 대신 사과의 말씀을 전해야 할지, 아이 교육을 신경 안 쓰는 무심한 엄마라 앞으로 학원을 보내겠다고 다짐을 해야 할지 참 난감했다.

그 주간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세게 한방 얻어맞은 것처럼 속이 쓰라렸다.

그러던 어느 날 요즘 인기 있는 티처스 같은 예능 프로그램을 본 뒤였던 것 같다.

엄마들끼리 사교육비로 얼마큼 쓰는지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집은 겨우 태권도만 매일 보내고 있어 나누기조차 민망했다. 그때 그분이 본인은 아이교육비로 한 달에 약 350만 원씩 쓰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서너 개 보내던 어머니들도 물론 놀라시는 눈치였지만 그날 이후로 진지하게 이 학교를 더 보낼 건지 고민하게 됐던 것 같다.


전학 후 1년이 흘렀다.

그분께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아이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것 같다고 했다. 어떻게 전학프로세스를 밟는지 질문을 하셨다.

이분께 이런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해줘야 하다니 신선한데?

돌이켜보면 그 학교 아이들이 왕따를 시킬 정도로 나쁘진 않은데 그 아이는 항상 어떤 아이와 문제가 있곤 했다.

여러 경로로 알아보니 피해자 코스프레 중이라는 얘길 들었다. 그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피해망상증이 심했고 자기 아이 만을 감싸고돌았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억울하다!

요즘 아이가 매일 학교에 안 가겠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그렇게 사랑했던 학교를 급하게 떠나게 됐다고 했다.

이젠 그놈의 학교라고 부르신다.


한때는 내 속에 한동안 분탕질해 뒀던 어머니신데... 시간이 흐르고 나니 왜 그때 불편했는지가 다 밝혀진다.

그래서 부모님 모임엔 웬만하면 나가지 말라나 보다.

그러고 보니 헛되이 살지 않았네 오늘도 힘나서 살아내자 내 자신

시간은 흘러 성장한 나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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