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연은 그 시절이었으니 가능했던 것
모든 만남과 사건에는 알맞은 때와 조건이 존재한다.
누군가는 젊어지고 싶다고 하지만, 40대의 안정감 있고 쉽게 들뜨지 않는 지금의 상태가 참 좋다.
이런 모습과 환경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노력해 왔던가.
20대를 돌이켜보면, 스스로를 보암직하게 보이기 위해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을 작은 거짓말을 주저 없이 하던 아이였다.
그런데 머리는 그다지 좋지 않아서 금세 탄로 났다. 자주 거짓이 드러나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손가락질당하는 악몽을 꿨을 정도니까.
막 스무 살이 됐을 무렵이었다.
실제로 일본과 미국에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12세 무렵 한 번씩만 다녀온 것이니 꽤 오래전 일이었다.
그런데 자주 여행을 다닐 정도로 부유하다는 티를 내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게 '1년에 한 번 정도는 여행을 간다.' 했더니, 곁에서 듣던 아이가 살짝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하기엔 이 가방에 붙은 입국 스티커가 너무 낡았다. 이것 좀 떼버리지?”
얼굴이 화끈거렸고, 그와 비슷한 일을 두어 번 당한 뒤로 거짓말이 점점 줄었다.
‘진짜는 가짜를 알아본다.’
운 좋게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만큼의 거짓말이라도 결국 스스로를 사라지게 하는 행위라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다행인지… 아마 심해졌다면 리플리 증후군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런 격동의 20대였지만, 강남의 한 대형교회에서 만난 제자반 아이들에게만큼은 조금의 거짓말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만큼 그 관계가 나에게 소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 이미지에 불리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벙긋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그 아이들과 있으면 내 신분이 상승한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곳에는 그동안 꿈꿔왔던 소위 SKY 출신들이 발에 채일 정도였고, 의치약대생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바라오 던 천국 같았다. 그 당시에는 잠만 집에서 잤을 뿐, 주말에는 거의 강남 교보문고에 살다시피 했다. 토요일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일요일은 유아부 봉사를 마친 뒤 다음 청년예배가 시작되기 전까지 교보문고의 귀퉁이 바닥에 앉아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을 하루에 꼭 한 권씩 읽어냈다.
용돈이 부족해 점심값은 물론이거니와 집이 있는 송파구까지 다녀올 버스비마저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밥값도 아끼고 책값도 아껴서, 붙박이처럼 서점에 앉아 책만 읽었다.
책 한 권을 읽으면 한 가지는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렇게 취업 전까지 압축적으로 5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 세월은 못난 나를 조금씩 바꿔놓았다.
그럼에도 대기업에 가까스로 입사했기에, 경쟁하고 살아남기 위해 점점 거친 사람이 되어갔다.
잠도 몇 시간 못 자고 일을 해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칭찬을 듣지 못하는 환경에서 자라서 인정욕구가 강했다.
20대에 만난 제자반 친구들은 지적일 뿐 아니라 문화적 소양도 갖췄었다.
전업주부에 외벌이 공무원 밑에서 자라, 몸뚱이만 서울에 있을 뿐 문화적 유산을 즐길 줄 모르는, 소위 말해 ‘서울 촌년’이었다.
삼청동 길이 그렇게 아름다운지, 덕수궁 돌담길이 그렇게 고즈넉한지 그때 처음 알았다.
커피를 마시는 행위도 그저 돈 낭비라는 편견에 갇혀 즐길 줄 몰랐다.
그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평소에 가지 않던 서래마을의 이탈리안 식당에서 호사스럽게 식사를 해보고, 건축디자인을 전공한 친구가 제작에 참여했다는 잠실 백화점의 에르메스 쇼윈도를 가만히 바라보기도 했다.
참 우아하게 꽃다발을 만들던 플로리스트 친구의 영향으로 지금도 고속터미널 새벽시장에 가서 꽃을 산다.
서울대 의대에 현역으로 단박에 합격했다는 친구를 통해, 홍콩은 나라가 아니라 중국의 특별행정구라는 것도 구별하게 됐다. 그 친구는 진짜 무식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얼마나 수치스럽던지!
난 아직도 플로리스트 친구 손에 이끌려 갔던 ‘에디 히긴스 퀸텟’의 재즈 연주회를 잊지 못한다.
그 당시 티켓 가격이 3만 원 정도였던가? 평소의 나라면 손이 덜덜 떨려 절대 가지 않았을 텐데,
그 친구가 “갈 사람이 없는데, 고작 3만 원인데 같이 가자”라고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따라갔던 곳이었다.
그때부터 공연 티켓이 아까운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제는 가을이 되면 에디 히긴스의 [Autumn Leaves]를 꼭 한 번 듣는다.
그 친구들은 쩍쩍 갈라져 사막 같았던 내면에 물을 주고, 영양분을 주며 가꿔줬다.
스물여덟 살 무렵, 고2였던 막내가 갑자기 많이 아팠다. 그런 그를 긍휼히 여기기보다, 그동안 가꿔왔던 이미지에 오점이라 여길 정도로 악하고 이기적이었다. 약 3개월 정도를 잠을 두어 시간만 자며 온 가족이 동생을 돌봤다. 너무 피곤해서인지, 놀라서인지 회사에서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완벽하게 가정을 꾸리고 싶어,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 외국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꿀 정도였다.
그 덕에 쉬지 않고 영어 공부를 했다. 난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결국 생각해 오던 대로,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그러니 그 삶이 평탄할 리가 없었다. 욕심과 욕망으로 점철돼 시작한 30대,
책을 통해 배웠던 교훈들은 나를 송두리째 바꾸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저 필연적으로 찾아온 고난이 나를 성숙하게 했을 뿐이다.
전쟁 같았던 신혼과 육아의 시절을 보냈다.
아이가 생기고 나서부터 가장 친하게 지내던 플로리스트 친구와 멀어졌다. 서운한 일이 생겼는데, 용서가 되지 않았나 보다. 분명 사과를 했는데, 부족했나 보다.
뒤끝은 길게 이어졌다. 험담을 한다는 느낌도 들고,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점점 우리는 소원해졌다. 한동안 찬란했던 20대를 함께 보낸 친구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는데, 어느 날 조인성 씨의 인터뷰가 위로가 되어줬다.
“우리가 왜 친할까? 그런 이유는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친하다고 해서 반드시 끝까지 친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 시절인연도 있고, 먹고살기 바쁘다 보니 잠시 연락이 끊길 때도 있고, 모든 사람이 그럴 거야.
가장 나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신뢰가 있을 때, 그 사람을 찾는 게 아닐까?
그게 우리 관계인 것 같아.”
그래, 조인성 씨 말처럼 아마도 그들에게 가장 나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가깝게 지내지 않았던 다른 친구들이, 육아로 정신없고 사무치게 외로웠던 나를 들여다봐줬다.
40대에 들어선 지금은 오히려 그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내 치부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고 드러낸다.
참, 관계는 예측할 수 없다.
이제 인생을 좀 즐길 줄 알게 됐다. 달리기만 하지 않는다. 천천히 걷는다.
숨을 꼭 참고 깊이 잠수하며 나아가느라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유유히 배영하며 하늘을 본다.
한숨 돌렸다. 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