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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압살롬 Mar 02. 2023

L1: 장거리 연애편지

오빠를 향한 편지를 제일 먼저 쓰지 않은 이유가 뭘까.


이건 사랑의 순서가 아니라 가장 쓰기 쉬운 편지의 순서이기 문인 것 같아.

오빠와 내 사랑의 관계는 항상 순간순간 속에 있어서, 글로 써버리면 어쩐지 어색하고 생경하게 느껴져. 구태여 말로 드러낸 마음이 우리의 친밀함을 다소 흐트러뜨리는 것 같아.


그래도 항상 오빠를 위해 써. 내 삶의 올바름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하기 위해 내가 배워야 하는 마음 가짐 같은 것이니까. 오빠가 아니었더라면, 이 삶을 올바르게 풀어내려는 시도라도 해보려 했을까. 아니, 그냥 마음 가는 내로 흘려보내다 어딘가에서 고여버렸을것 같아. 그리고 불현듯 가벼워지려 했을 거야.


이 관계가 불어넣어주는 생명이, 단순한 삶의 진리가, 소박한 노력이 나의 혼란을 받쳐주는 유일한 질그릇이니 말이야.      


이곳에 오기 전에나 도착한 후에나, 먼 거리는 정말 아무런 문제가 되지를 않네.

너무나 힘들었던 첫 학기에도 보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함께하지 않는 이 순간이 의아하게만 느껴지더라구. 그만큼 우리가 함께하는 삶은 이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조차 없는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나 봐. 이제 내가 두려워하는 게 이별이 아닌 함께하는 것 그 자체라는 게 어찌나 우스운지. 떠난다는 말을 더 이상 무기로 쓸 수가 없어서 나는 이제 무엇을 집어 들고 마음을 구걸해야 하나 싶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어떤 자유의 선택지가 남아있는 것처럼 구는 이유는, 그게 내 과거가 드리운 유일한 그림자라 그런가 봐. 책임 없는 방종이었지만 그래서 후회할 것조차 없는 그런 탁 트인 시절을 이따금 그리워하면서도, 진심으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은 없어. 무거운 사랑을 짊어지는 것이 자유보다 더 어려운 것임을 이제야 겨우 이해하게 될 수 있게 되었어. 책임과 성숙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야.      


서로의 바깥을 바라다보면, 세상은 복잡하고 그걸 보는 우리의 마음도 편안치 않아. 그런 미묘한 마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갑자기 세상은 작아지고 그곳에 드리운 무게감도 사라지지. 이런 낭만성이야말로 현실을 살아가는 젊은 연인의 방만이라 할 수 있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몰지식함으로 인하여 우리가 밥벌이를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아. 그런 미묘한 현실감 속에서 나는 오빠를 사랑하고 오빠를 사랑함으로써 인생을 사랑하게 돼.      


가난이 대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창밖으로 뛰쳐나간다던데, 그만큼 사랑과 가난은 함께 하려야 할 수 없는 철천지 원수라는 소리겠지. 하지만 졸부에게도 정 많은 가족이 있듯이 대책 없는 우리의 사랑에도 어떤 소박한 계획이라는 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그 계획의 일부로 우리는 각자 사랑하는 일을 만났나 봐. 집 안에도 사랑하는 존재가 있고, 집 바깥에도 헌신할 대상이 있어서, 나는 너무나도 행복해.      


유학을 처음 결심하던 날, 그리고 유학에 대한 계획을 짜던 어느 날, 불현듯. 가난한 미래를 예견하게 된 날이있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문대의 등나무 벤치에서 종종 거리는 마음으로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지. 그리고 착잡한 눈으로 넘어가는 석양과, 그런 식으로 스러질지 모르는 내 불안한 미래에 대해서 생각했어. 달칵하고 통화가 연결되자 또다시 문득. 나에겐 사랑하는 사람과 그런 사랑을 기록하던 작가들의 얼굴이 떠오르더라. 그리고 내게 있는 것은 사랑뿐이라는 영혼의 부유를 깨달은 거지. “나 앞으로 10년 동안 돈 벌긴 틀렸어. 그러니까 오빠도 앞으로 10년은 더 가난해도 돼!”     


생각해 보면 우리 사랑에도 가난이 대문 앞까지 온 날이 있었는데, 왠지 초라하게 서 있는 가난을 가여운 친구쯤으로 여겼나 봐. 내 손에 쥐어진 이 생경한 소박함을 나는 우리 사랑의 낭만이라 여기며 철없이 나아갈게. 5년 뒤에, 잘하면 4년 뒤에, 건강하게 만들어갈 우리의 진짜 결혼 생활을 기약하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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