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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티 May 21. 2021

우연히 행복을 만났다

1박 2일 태안 여행 이야기


마을에 코로나가 터졌어
아쉽지만 이번 주말에는 내려오지 말고
다음에 와


어버이날부터 석가탄신일까지 무려 5일간의 휴가를 얻게 된 오빠와 시댁 방문 & 안동 여행을 계획했었는데, 이놈의 코로나가 시댁 동네를 휩쓸어버린 탓에 모든 계획이 무산되었다. 예약했던 숙소도 이러한 우리의 사정을 알았던 것인지 갑작스럽게 예약이 취소되어 버렸다. 사실 일주일 넘게 이삿짐 정리를 하느라 좀 피곤하기도 했고 집에서 푹 쉬고 싶었던 마음도 컸기에 그래, 잘됐다! 집콕이나 하자며 여행을 다음으로 기약했다.

그런데 연휴라고 인스타그램에 여기저기 놀러 가는 지인들의 사진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아.. 가까운데라도 다녀올까’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멀리 가기는 또 귀찮고, 그냥 가까운 바닷가나 가볼까 하고 무작정 태안을 골랐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 과거에 유조선 기름 유출 사고가 났었던 곳, 충청남도 바닷가 그 어딘가. 나에게 태안은 딱 그 정도의 장소였다.


그렇게 우연히 떠난 태안에서 행복을 만났다.




행복 01

우연히 만난 바다


수평과 바다 향이 그리워 문득 충남 태안군을 떠올렸다. 태안(泰安)은 클 태, 편안한 안을 쓴다. 이름만 들어도 왠지 마음이 놓인다.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안락하다는 국태민안(國泰民安)에서 나왔다. 세곡선과 무역선이 지나던 뱃길(조운로)이 있고, 이곳 물살이 빠르고 험해 지나는 배의 무사안녕을 바랐던 까닭이다. ‘내게 금지된 것’을 소망하는 일은 인간의 본연인 듯하다. 금속과 유리, 시멘트로 쌓은 수직(垂直) 속에 살다 보니, 방해받지 않는 평행이 절실하다. 수평선(水平線)이다. 광합성이나 비타민 등 자연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 수평이 태안 앞바다에 있다.

태안군은 안면도 덕분에 무척 긴 해안선을 지녔다. 무려 559.3㎞. 서울~부산 거리보다 길다. 도서 119개, 항·포구는 42곳이 있다. 꽃지와 만리포 등을 제외하고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해수욕장만 해도 29개다. 전체가 태안해안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 <이제는 안녕(安寧)으로 향할 때’ 태안(泰安)의 봄으로 가는 길> 기사 발췌


서울-부산보다 긴 해안선 길이, 태안의 해안선 전체가 해안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바다로 유명한 태안. 과거 기름 유출 사고가 있었던 곳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맑은 바다가 우리를 맞이했다. 기름 유출 사고 당시 무려 50만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태안으로 모였다고 하니 태안의 이 아름다운 바다를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난 숲과 바다를 ‘바라보는’ 여행을 좋아한다. 어릴 때 계곡에서 길을 잃어버릴 뻔한 기억과 바닷물에 빠져 죽을 뻔한(?) 기억이 있어서인지 들어가는 것은 즐기지 않으나 푸르른 녹음과 햇빛이 부서지는 바다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것은 너무 큰 즐거움이다. 그래서 여행도 숲 속으로, 바다가 가까운 곳으로 자주 떠났다. 코로나가 터진 후 해외 여행길이 끊기면서 예전보다 국내 여행을 더 많이 다녔는데 그런 나 역시도 태안은 단 한 번도 여행지로 고려한 적이 없었다. 뭐랄까 나에게도 모두에게 통용되는 일반적 공식을 따르려는 본능이 있었던 것 같다. 바다 하면 제주, 숲 하면 강원도 이런 식의 공식 말이다.



하지만 우연히 훌쩍 떠난 바다에서 정말 인생 바다를 만났다. 끝없이 펼쳐지는 수평선, 수심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맑은 바닷물, 햇빛이 쏟아져 부서지며 더욱 장관인 파도, 아무도 없이 드넓게 펼쳐져 있는 모래사장. 집에서 2시간 거리인 곳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장소가 있다고? 내 눈을 의심했다.

서핑으로 유명한 만리포 해수욕장이나, 낙조로 유명한 꽃지 해변 외에 자동차를 차고 가다가도 그냥 우연히 멋진 해변을 마주하게 된다. 이 해변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필요도 없다. 그냥 오롯이 보이는 바다를 즐기기만 하면 되니까.


텅 빈 모래사장에서라면 점프샷도 가능하다


무려 숙소 뒤에도 작은 미니 해변이 있었다. 숙소 사장님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 지금도 아찔하다. 아무도 없는 해변을 남편과 나 둘이서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이 해변을 채우는 것은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뿐.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의 경계가 무너질 정도로 푸르른 이 바다를 누릴 수 있음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바다는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위안을 주었다. 파도가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니 마치 우리의 삶처럼 느껴졌다. 커리어, 미래,   자체에 대한 고민. 행복과 불안을 왔다 갔다 하며 살아가는 . 앞으로도 파도처럼 계속 부딪히고 왔다 갔다를 반복하며 살아가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이 바다 덕분에 우리의 삶을 온전히 인정하게 된 것이다.


숰소 뒤 해변이라니, 믿겨지시나요?
길 가다 만난 광경


행복 02

우연히 만난 음식


꽃게를 숯불에 구워 먹으면 맛있다는 남편의 뇌피셜을 믿고 근처 천리포항 수산센터에 갔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각종 싱싱한 해산물이 가득했다. 나는 해산물, 특히 새우나 게 같은 갑각류 덕후라 꽃게를 사서 구워 먹을 생각에 신이 났다. 그런데 생각보다 꽃게가 너무 비쌌다. 1kg에 5만 5천 원. 모든 가게의 가격에 똑같았다. 고작 세네 마리인데 5만 원이 넘는다니... 좀 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다른 수산센터에 가보기로 했다. 숙소와의 거리를 고려해 30분 거리의 학암포항으로 향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숙소와도 거리가 정 반대 방향이었고 학암포항 수산센터는 천리포항 수산센터의 반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작은 곳이었다. 꽃게는 살 수 있기는커녕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다시 천리포항으로 가기엔 숙소에 가서 저녁을 먹을 시간이 너무 늦어질 것 같았다. 그때 어쩔 줄 몰라하는 우리에게 한 가게 사장님이 가리비 조개를 먹어보라며 추천해주셨다.

 


본가가 오이도인지라 조개구이는 지겹도록 먹어봐서 전혀 끌리지 않았으나 가게 사장님이 요즘 가리비가 완전 꿀인데 가격도 저렴하다며 강력 추천을 해주셔서 고민 끝에 꽃게를 포기하고 가리비를 구입했다. 태안의 조개는 조금 다르려나 하면서 구입한 가리비는 정말 달랐다. 불에 올려두고 10분 정도 지나니 빼꼼하고 뚜껑이 열리며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5분 정도 더 익히고 속살을 꺼내 먹으면 입에서 그대로 녹아버린다. 조개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어? 초장을 찍어먹지 않아도 가리비의 풍미가 그대로 느껴진다. 깨끗한 바다에서 자라 신선한 조개를 2만 원에 먹을 수 있다니. 오이도에서는 조개구이만 10만 원이 넘는데 말이다. (심지어 맛도 별로 없다.)


태안 하면 꽃게가 유명하다고 해서 꽃게만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가리비한테 반해버렸다. 생각해보니 해외여행지에서도 그랬다. 독일 여행을 갔을 때 학센이 아닌 쌀국수에 반해버렸고, 이탈리아 여행을 갔을 때도 파스타와 피자보다는 부라노에서 파는 생선 튀김에 푹 빠졌다. 마음 가는 대로 움직였을 뿐인데 그것들이 나에게는 인생 맛집, 인생 음식이 된 것이다.

가리비를 냠냠 먹으며 느낀 것은  모두가 생각하는 정답이 나에겐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것. 그냥 내가 마음 가는 대로, 그 순간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했을 때 더 큰 행복이 올 수 있다는 것.




행복 03

우연히 난 낙조


낙조 (落照)

1. 저녁에 지는 햇빛.
2. 지는 해 주위로 퍼지는 붉은빛.


낙조의 사전적 의미 중 1번은 도심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으나 2번은 쉽게 만나기 어렵다. 제주도에서도 일몰과 일

출은 보았으나 해 주위로 퍼지는 빛은 쉽게 보기 어려웠다. 생각해보면 낙조라는 단어를 떠올린 적이 있었던가? 내 일상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해가 뜨기 전 사무실에 출근하고, 해가 진 후 퇴근하는 직장인의 삶을 살아왔으니까.



태안에서 낙조로 유명한 곳은 안면도의 꽃지 해변이다. 하지만 나는 꽃지 해변이 아닌 학암포 해변에서 인생 노을과 낙조를 만났다. 학암포항에서 가리비를 구입하고 나오니 해안 수평선 경계로 그라데이션하듯 낙조가 깔리기 시작했다. 워낙 작은 해변이다 보니 강아지 한 마리와 낙조를 보는 젊은 남성분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풍경에 심장이 콩쾅콩쾅했다. 불과 30분 전에는 푸른 하늘과 바다를 마주하고 있었는데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믿을 수 없었다. 어린아이처럼 오빠와 해안둑 위로 폴짝 올라갔다.

바다 중앙의 작은 섬은 마치 그림 속 풍경을 보는 듯했다. 점점 짖게 깔리는 낙조가 바다를 드리우는 장면은 정말 장관이었다. 내 생애 이런 낙조를 본 적이 있었나.



해 주변을 감싸는 붉은빛이 어찌나 멋지던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멍하니 낙조를 바라보는 여유를 느낄 수 있어 감사했다. 낙조를 바라보며 누릴 수 있었던 여유와 평온함, 그 시간이 비록 길지 않았지만 그 시간 덕에 태안에서의 1박 2일, 그리고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행복하다.





만약 시댁 방문이 취소되지 않았다면, 태안을 가지 않고 다른 곳에 갔다면, 숙소 뒤 해변을 만나지 못했다면, 천리포항에서 꽃게를 샀다면 만나지 못할 행복들이었다. 일상은 계획이 아닌 우연이 주는 즐거움으로 채워야 더 풍요롭고 행복해짐을 태안에서 느끼고 돌아왔다.


앞으로도 우연히 만나는 행복을 따라가며 살아가야지.

우연이 주는 행복을 만나러 조만간 또 태안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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