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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향기 May 23. 2023

명예퇴직원을 쓰다

결국 명예퇴직원을 쓰기로 했다. 1년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엊그제 명예퇴직신청 공문이 왔기 때문이다. 8월 31일 자 퇴직이다. 솔직히 8월 퇴직은 마음에 없었다. 1년을 마무리하고 그만 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공문을 받고 보니 마음이 흔들렸던 것. 때마침, 곧 나을 것 같은 입병은 다시 악화되는 증세를 보이고, 감기도 심하게 들고 덩달아 불면증도 심해지고 있었다. 원래 교육청에서는 8월은 명예퇴직을 안 시켜주는 입장이다. 중간에 그만두면 교육과정에 차질이 있으니,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안된다고 빨간 글씨로 명문화시켜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가피한 경우에 내가 해당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청했다가 안되면 말지 뭐... 하는 생각으로 서류를 작성하고 있다. 그래도 서류를 보고 한 이틀 정도는 고민에 빠졌다.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 나, 8월에 그만두어도 될까?"

 " 8월? 마음대로 해~"

 금방 답이 나온다.

 "그래도 8월에 하면 아이들이 피해를 입을 텐데, 학교에서도 기간제를 뽑아야 하니까 힘들고..."

아이고, 그런 건 쓸데없는 생각이다, 지금 놀고 있는 젊은 인력이 얼마나 많냐, 젊은 인력에게 길을 터줘야 한다, 내가 꼭 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이 더 잘한다... 등등의 말을 쏟아놓는다.

  " 하긴 그래, 기간제가 오면 분명 젊은 사람이 올 텐데, 얘들이 더 좋아할 거야... "

 나는 한층 풀이 죽은 목소리를 냈다. 

 점점 힘이 없어진다. 내가 꼭 해야 한다, 이것이 옳다, 이것은 꼭 하고야 말겠다... 하는 생각이 없어지고 있다.

  

원래, 신안의 작은 섬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 2년만 더 하려고 했다. 그런데 벌써 4년째 근무하고 있다. 생각 외로 아이들이 정말 착하고 예뻐서이다. 공교육이 무너진다고들 하지만 이곳은 몇몇의 아이들이 학교를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다. 공부를 좀 안 하고 못하긴 하지만, 그래도 시험을 보면 자기 점수가 궁금해 미치겠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아이들 덕분에 2년을 더 하고 있으니 지금 그만두어도 된다. 그래 그만 두자.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일단 신청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뭔 서류가 이렇게 복잡하고 많냐. 챙길 것이 무려 10가지나 된다. 그중 나를 제일 고민에 빠뜨렸던 건 명예퇴직 사유를 적는 난이다. 나는 건강상의 이유를 구구절절이 늘어놓았다. 아니 구구절절이 쓰지도 못했다. 정해진 분량이 있기 때문에 최대한 압축해서 상황을 잘 말해야 했다. 상황이란 입병과 불면과 출퇴근 문제. 엄살을 최대한 늘려서 썼다. 출퇴근 문제는 장시간 운전하기가 힘들다는 이유를 들었다. 집에서 관사까지는 고속도로를 통과해서 1시간 10분. 서울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코웃음 칠 일이지만 나에게는 버거운 것이므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아마 안될 거라는 생각이 크지만 일단 명예퇴직원을 신청한다는 것만으로도 조금 마음이 가벼워진다.

7개월 남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3개월로 줄어들 수도 있으니까. 지루했던 마음이 짧아지고 있다. 학교도 더 이뻐 보이고 아이들 동작 하나하나가 더 이뻐진다. 이건 마음에 불과하겠지만 하여튼 그렇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것이라더니 다 맞는 말이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는 말을 조금 돌리면 '모든 것은 다 마음에 달려있다'와 통하는 것 같다.

 연금공단에 들어가 퇴직금을 조회해 보고 연금 수령액을 조회해 본다. 사회에서는 교사들을 철밥통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방학은 방학대로 다 놀면서 절대 잘릴 일이 없고 연금을 탄다는 이유에서다. 그 연금을 조회해 본다. 첫 화면에 60대의 노후생활비 평균값이 나와 있다. 최소노후생활비는 부부기준 월 207만 원, 적정노후생활비는 288만 원이다. 내 연금만으로는 2인 가족이 적당하게 살기가 빠듯하구나. 사회에서 아무리 철밥통이라고 해도 혼자의 월급만으로는 살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교사라 해도. 사회에서는 교사의 직업을 공무원이라고 너무 확대해석하는 부분도 있다. 맞벌이가 아니면 교사 월급만으로는 한 식구를 부양하지 못한다. 연금도 그러하다.  학교에 30년을 근무했는데 한 가족을 부양하기는 넉넉하지 못하다는 뜻.  평균 이하로 눈높이를 낮추면 모를까. 

 (어떤 사람이 말했다. 30년 이상을 꼬박꼬박 일했어도 막상 집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부동산 한탕이었다고. 건물을 대출받아 지었는데 그 건물이 껑충 뛰어서 원하던 아파트를 사고 자식한테까지 사줄 수 있었다는 말이었다. 평생 월급을 저축해서 집을 살 수 있는 경제 구조가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래도 나는 곧 연탄녀(소위 연금 타는 여자를 그렇게 말한다)가 될 것이니 백번 감사할 일이다. 늙어도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에 비하면 호강에 넘쳐나는 소리를 지금 하고 있는 셈이다. 계산을 한 김에 8월에 퇴직을 하는 것과 내년 2월에 퇴직하는 것을 비교해 본다. 올 8월에 그만두면 내년 2월에 하는 것보다 약간의 손해를 보는구나. 그 사이 추석 상여금과 설 명절 상여금이 끼여 있고 한 차례 보너스가 끼여 있어서. 6개월을 참고 더 참을까... 돈 욕심이 든다. 버리기 힘든 것이 인간의 욕심이고, 그중에 큰 것이 돈 욕심이다.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다행이다. 8월에 퇴직을  할 수 있으면 내 몸이 좀 더 편안해져서 좋고, 퇴직이 안되면 돈을  더 벌 수 있어서 좋고... 그렇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덕분에 내년 2월에 하겠다고 그러니 7개월이나 남았다고, 언제 그 7개월을 다 채울 것이냐고, 섬마을 풍경도 이제 너무 질리고 무료하다고, 적적하고 너무 고요해서 살맛이 안 난다고 푸념하던 마음이 가셨다. 덕분에 남은 3개월이 소중해진다. 오늘도 체육대회인데 하루 종일 아이들 옆에 있었다. 안 되면 2학기에 또 몇 달 밖에 안 남은 것이니까 그때도 또 소중한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명예퇴직원 덕분이다. 명예롭게 퇴직할 그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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