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휴지통은 어디에 있을까?
비 내음이 난다. 진한 흙 내음이 올라온다. 야속한 바람이 날려버린 낙엽들 위로 빗방울이 톡톡 떨어진다. 우산을 잡은 손은 단풍잎처럼 빨개진다.
가을의 문턱을 지나 차갑게 내리는 비다. 가을비가 내린다.
비는 사계절마다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같은 이름이지만 마음에 와닿는 모습이 다르다. 가을비가 내리면 왠지 쓸쓸해진다. 외로움이 느껴진다.
가을비가 화려한 계절의 마지막인 것처럼 느껴져서일까. 내 마음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대신 내리고 있다고 느껴서일까.
가을비가 내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선명해지니 내 마음이 보이기 시작하는 걸까.
가을이 끝나감을 알려주는 듯이 내리는 가을비는 세상의 모든 색을 선명하게 만든다. 하늘은 어두움으로 진해지고 길거리의 불빛들은 반짝반짝 빛난다.
마지막 잎새처럼 떨어지는 날을 기다리는 나뭇잎들도 그 색을 더욱 깊게 내보인다. 가을의 색이 더욱 짙어진다. 주변이 무엇하나 선명해지지 않는 것이 없다.
마치 자기의 진짜 색을 되찾은 것 같다. 그래서일까. 차가운 듯 보이지만 왠지 따스하게도 느껴진다.
가을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자기만의 따스함을 찾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나 차 한잔. 몸을 따듯하게 덮어줄 외투 하나. 내 차가워진 손을 잡아줄 사랑하는 사람.
그 따스함에 하루를 달랜다. 가을비가 내려 선명해진 세상만큼 선명해지는 따스함이다. 그래서 가을비가 차갑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에도 가을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뜨거웠던 여름처럼 우울한 마음으로 달구어진 내게 가을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그 마음들이 가을비로 흘러내려 내 마음도 진짜 나의 색으로 선명해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위로받았으면 좋겠다. 또 그렇게 포근한 겨울을 맞이하고 싶다.
누구에게나 슬픈 일은 있다. 우울한 마음은 늘 기회를 엿보듯이 불쑥 찾아오고 아픈 마음은 언제나 아프다. 익숙해지지 않는다.
마냥 슬픔에 주저앉아있는 일은 나를 끝없는 우울함에 빠져 지치게 했다. 스스로에게 무작정 힘내라는 응원은 나를 가식적으로 만들었다.
무엇 하나 쉽지 않았고 정답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민해야 했다. 슬프지만 괜찮아질 거라고 마음을 달래야 할까. 아프지만 나아질 거라고 마음을 쓰다듬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인정하기로 했다. 가을비가 내려 선명해지는 세상처럼 내 마음을 선명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슬프고 우울하다. 지금 솔직한 내 마음이다.
나의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조금은 슬픔이 더욱 진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괜찮다. 선명해진 마음은 선명하게 위로받을 수 있다. 위로해 줄 수 있다.
비가 오고 선명해지는 가을처럼 내 마음도 이 비에 씻겨내려 선명해졌으면 좋겠다.
그 선명해진 마음을 마음껏 위로받았으면 좋겠다. 한없이 선명해져 모두에게 따스한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모두의 마음에도 가을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가을비가 내려 가려져 있던 마음들이 선명해졌으면 좋겠다.
그 선명해진 마음들이 마음껏 위로받았으면 좋겠다. 선명하게 위로받은 마음들이 가을비에 반짝이는 불빛들처럼 환하고 따스해졌으면 좋겠다.
마치 가을비의 선물인 듯 모두 다가오는 하얀 겨울을 빛나게 맞이했으면 좋겠다.
소중한 사람이 슬프지만 괜찮다고 말한다.
“아니야. 우리 선명해지자. 너의 마음에 가을비를 내려. 그래서 너의 마음이 선명해지면 내가 더욱 선명하게 너의 마음을 쓰다듬어 줄게. 너를 더욱 따스하게 안아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