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페 디엠
요즘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는 것이 있다.
언제나처럼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면 나를 향해 라일락 꽃향기가 진하게 불어온다. 그 향기를 맡으며 ‘역시 집이 최고야’ 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고개를 끄덕인다.
집에 들어오는 순간 느껴지는 편안함과 안도감에 늘 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는데 요즘은 왠지 모를 뿌듯함이 함께하는 시간이다. 라일락 향기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
나는 식물과 함께하고 있다. 반려 식물이 많지는 않지만, 함께한 시간이 길고 나름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가끔 더 많은 식물을 기르고 싶은 마음에 고민하다 나의 욕심인 것 같아 그 마음을 접어 둔다. 나중을 위해 한걸음 양보한다는 마음이랄까. 얼른 나만의 큰 정원을 가지고 싶다.
지금은 작게나마 베란다에 마련해 놓은 공간이 나의 작은 정원이 되어주고 있다. 라일락이 정원에 함께한 지는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처음 만나 집으로 같이 왔을 때와 큰 변함은 없다.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자라고 있는 걸까. 같이한 시간에 비해 크게 자라지도, 밑줄기가 많이 굵어지지도 않았다.
한결같이 때가 되면 꽃을 피울 뿐이다. 내가 자주 들여다보지 못해 미처 그 꽃이 왔음을 알지 못하면 달콤한 향기로 자신을 봐달라고 말해준다.
해마다 날씨 때문인지 꽃을 피우는 시기가 조금씩 당겨지고 저무는 시간이 빨라졌다. 올해는 조급하지 않게 4월 말이 다 되어서야 꽃을 보여주었다.
작년 겨울의 일이었다. 라일락잎이 다 떨어진 모습을 보고 남편이 큰일 난 거 아니냐며 놀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약간의 조바심이 났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 봄이 왔고 새순이 조금씩 올라오고 나서야 나는 마음을 온전히 놓을 수 있었다.
꽃대가 올라오는 모습을 놓쳐 뒤늦게 라일락 꽃이 핀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말이다.
피곤했던 어느 날 거실에서 잠깐 낮잠이 들었는데 열려있는 베란다 창문을 통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 선선한 바람을 따라 달콤한 향이 나에게 다가와 잠결에도 미소 짓게 했다. 라일락 꽃이 피었구나. 먼저 알아주지 못해 미안해.
베란다에 나간 나는 보라색의 앙증맞은 꽃이 바람에 작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안녕!
내가 초등학교 시절 라일락과 나의 인연은 처음 시작되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아빠가 나무 한 그루를 집 마당의 정원에 심고 있었다. 라일락이었다.
처음에 나에게는 그저 정원에 심긴 나무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빠의 말 한마디로 내게 큰 의미를 가진 나무가 되었다. 너의 나무이니 잘 키워보라는 말이었다.
처음이었다. 나의 나무가 생겼다. 세상에 수많은 나무가 있어도 이 라일락만이 나에게 유일한 나무 같았다.
내 키의 반만 한 녀석이 무럭무럭 자라 내가 쉴 수 있는 그늘을 얼른 만들어주었으면 했다. 그래서 이름도 지어주고 날마다 안부를 물었다.
꽃을 피우는 날에는 정원에 오랜 시간 서서 그 향기의 달콤함을 누리기도 했다. 비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에는 나무가 꺾이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나의 몸과 마음을 따라 집의 정원에 들어서는 순간이 많아지는 날들이었다.
하나의 나무를 맞이한다는 것이 마음을 내어주는 정성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준 고마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어느덧 중학생이 된 내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라일락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에게 물어보니 라일락 뿌리 때문에 다른 나무가 잘 자라지 않아서 아빠가 나무를 뽑았다고 했다. 내 나무라면서 나에게 한마디 상의 없이 벌어진 일에 서운했다.
인사 한마디 하지 못하고 떠나보내 서러웠다.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 미안했다. 나는 그 뒤로 한동안 정원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렇게 어린 날의 나는 정원에서 친구를 만났고 헤어졌다. 꽃말처럼 라일락은 나에게 젊은 날의 추억이자 첫사랑이었다.
수험생이 되어 공부를 하고,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시작하느라 바빴던 나는 반려 식물을 키울 여유가 없었다.
사실 예전 그때만큼 식물에 줄 수 있는 마음과 정성이 없었거나 싫었던 것도 같다. 내가 식물에 다시 애정을 갖기 시작한 건 결혼을 하고 나서였다.
원래 식물을 좋아했던 나는 집에 하나둘씩 반려 식물을 맞이했다. 나의 부족함으로 떠나보낸 식물이 많지만 서툴러도 열심히 노력해 보았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친정 부모님 또한 식물을 좋아하고 잘 돌보았다. 그래서 나는 친정집에 갈 때면 종종 마음에 드는 식물을 데려오고는 했다.
그러다 한번은 아빠가 나에게 가져가라며 화분에 심긴 나무 한 그루를 보여주었다. 라일락이었다.
옛일이 문득 생각났다. 아빠의 기억 속에 있는 미안함인가, 아니면 낭만적이게도 돌고 돌아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일까.
그때의 라일락보다 한참 작은 아이였지만 반가움은 무척 컸던 것 같다.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라일락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라일락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내 곁을 잘 지켜주고 있다. 지금은 나의 작은 정원에 터줏대감 중 하나이다.
봄이 되면 많지 않아도 매번 꽃을 피워주고 짙은 향으로 온 집안을 달콤하게 만들어주는 친구.
잘 자라주고 있다는 뿌듯함과 그때 우리의 모습을 아련하게 떠올려 추억하게 만드는 친구. 나의 라일락이었다.
작고 앙증맞은 연보랏빛 꽃들이 탐스럽게 피어있는 라일락. 달콤한 향기와 함께 내게 봄을 가져다준 작은 정원의 친구.
올해도 어김없이 나의 친구는 나를 반갑게 찾아왔다가 또다시 조용하게 안녕을 고하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라일락 꽃이 떠나니 여름을 알리는 꽃이 기쁜 안녕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