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책갈피

워킹맘의 기나긴 하루

by 헬레나

회사에서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프로젝트준비로 골머리를 앓은 하루였다. 거기에다 미팅이 세 개나 잡혀 있어서, 온전히 프로젝트에 몰입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마지막 미팅이 겨우 끝나고 자리로 쏜살같이 돌아와 자료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몇 시간을 그렇게 모티터 속에 빠져 있었을까? 왼쪽어깨가 뻐근하게 저려왔다. 스트레칭을 하려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을 때 벽에 걸린 시계의 시침이 눈에 들어왔다. 시침이 5를 가리키고 있는 게 아닌가?

"오 마이 갓! 늦었다!"


정신없이 가방을 싸서 주차장으로 나와 차에 올라탔다. 페달을 열심히 밟아 첫 번째 목적지인 둘째 아이의 유치원에 도착했다. 반갑게 나를 맞이하시는 선생님을 뒤로하고 둘째를 거의 낚아채듯 데리고 유치원밖으로 빠져나왔다. 두 번째 목적지, 큰애의 방과후학교가 곧 문을 닫기 때문이다.


다시 20분을 더 달려서 큰애의 초등학교 주차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미 10분 늦었다. 뒤를 돌아보니 둘째는 그새 잠이 들어 있었다. 이럴 땐 정말 둘째를 차 안에 놓고 혼자 얼른 가서 첫째를 픽업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인 여기는 미국이니까. 잠깐이라도 아이를 혼자 차에 놔뒀다간 경찰서에 붙잡혀 갈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곤히 잠든 둘째를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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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얼대는 둘째를 겨우겨우 달래며 주차장을 가로질렀다. 학교 안으로 들어서서 이번엔 복도를 열심히 달린다. 오늘따라 그 복도가 왜 그리 길게 느껴지던지. 드디어 복도 끝에 있는 교실이 보였다. 오늘도 우리 큰애가 마지막인지, 선생님이 문 앞에서 큰애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또 늦었네요." 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선생님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저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 선생님한테 난 늘 죄인이 된 기분이다.

또다시 30분을 열심히 달려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그렇게 퇴근 후 두 아이들의 픽업전쟁이 일단락되었다. 몸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다.


나는 애들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와 거실 소파에 잠깐 앉아본다.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오면서 애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 처음으로 마주하는 우리 아이들 얼굴이다. 새벽에 아이들이 깨기 전에 일찍 출근하기 때문에 저녁이 되어서야 아이들을 볼 수 있다.


'하루종일 떨어져 있다가 드디어 만난 아이들. 지금이라도 마주보고 앉아서 그날 있었던 일도 묻고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잠깐 상상했다.

그렇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바로 저녁을 준비해야 한다. 요즘 들어 이럴 때 누가 집에 외서 저녁만 해줘도 너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맛있는 저녁을 식탁에 차려놓고 사라지는 우렁각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꿈을 가끔 꾼다.


부엌에 들어가 정신없이 저녁준비를 하다 보면 애들도 각자 학교에서 긴 하루가 힘들었는지 짜증 내고 보채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반대로 에너지가 넘쳐서 괴성을 지르며 레슬링을 하던지. 두 가지 경우 모두 에너지가 방전된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나는 자꾸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곤 한다. 그러곤 바로 후회하면서도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아직 3월인데 아주 따뜻한 날이었다. 아이들도 그 온기를 감지했는지 책가방을 내팽개치고 앞마당으로 잽싸게 뛰어 나갔다.

덕분에 나는 평온하게 저녁을 준비할 수 있었다. 빠르게 저녁거리를 씻고 다듬어서 오븐에 넣고 타이머를 맞췄다. 휴, 이제 저녁이 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아이들이 잘 놀고 있는지 체크하러 바깥으로 나가 봤다. 두 녀석이 축구공을 차며 잘 놀고 있다. 이제 많이 컸다. 엄마도 안 찾고 둘이서 잘 놀고 있다니. 그 순간 오늘 처음으로 편안함이 느껴졌다. 새벽부터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정신없었던 뛰었던 하루였는데.


오븐 안에서 저녁이 완성되고 있고, 아이들은 신나게 잘 놀고 있다. 나는 이 아까운 30분을 낭비할 수 없어서, 안에서 읽고 있던 책을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마당구석에 있는 벤치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한 10분 정도 지났을까? 큰애가 갑자기 내게 뛰어왔다.

"엄마 손 내밀어봐"

나는 궁금한 표정으로 얼른 두 손을 내밀었다.

어디서 꺾었는지 큰애가 내 손위에 민들레꽃을 살포시 내려놨다.

"엄마 이거 북마크야. 엄마 가져" 그리고는 쏜살같이 다시 둘째 쪽으로 달려갔다. 샛노란 민들레꽃이 내 눈에 쏙 들어오면서 온종일 쌓였던 피로가 한방에 스르르 녹았다.


시크한 성격의 우리 첫째는 어릴 때부터 애정표현에 엄청 짜다. 그렇지만 아주 가끔씩 이렇게 크게 한방씩 날려준다. 그것도 아주 진한 감수성을 담은 선물들로. 그 아이만의 표현방식인 것이다.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우리 큰 애표 민들레 책갈피, 잘 말려서 고이고이 간직해야겠다.


쉽지 않은 워킹맘의 삶, 그렇지만 나는 이런 순간들 때문에 버틸 수 있다. 예쁜 민들레꽃을 내려다보니 내일 또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힘이 갑자기 불끈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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