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감정적인 협상이라니.
<물괴>와 <명당>, 그리고 <안시성>까지 세 편의 영화가 영 기대에 못 미친 상황에서 추석 시즌, 한국 영화 빅4의 대미를 장식할 <협상>을 관람하였다. 매 작품마다 평작과 졸작 사이를 오가는 JK필름이 제작을 맡은 만큼 기대치가 그리 크지만은 않았던 이 영화는 최소한 중반부까지는 생각 이상의 재미를 안겨주며 '의외의 발견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물씬 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잘 쌓아오던 것들이 후반부에 이르러 한순간에 무너져내린다는 것이 문제겠지만.
영화는 서울경찰청 위기 협상팀에 복무 중인 경위 하채윤이 경찰과 기자를 납치해 초유의 인질극을 벌이는 무기 밀매업자 민태구와 협상을 펼쳐가는 과정을 그려나간다. 영문도 모른 채 태구를 상대하게 된 채윤은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이 인질극에 생각 이상으로 많은 이들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되고, 무사히 인질을 구출해내기 위해 위험천만한 협상을 이어나간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영화는 중반부까지만 하더라도 기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한다.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한 예측을 깨뜨리며 단숨에 강렬한 임팩트를 선사하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채윤과 태구가 스크린을 통해 처음으로 대면하고 서로에 대해 탐색하는 과정은 쫀쫀한 긴장감을 안겨주며 이후의 전개에 대한 궁금증을 높여준다. 특히 인질로 잡혀있던 기자의 정체가 드러나며 본격적으로 판이 커지기 시작한 이후의 전개는 더더욱 영화에 몰입하게 만들며,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충분히 인상적인 영화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두 주인공 하윤과 태구를 각각 연기한 손예진과 현빈의 호연이다. 남성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협상 본부에서 그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는 카리스마를 선보이는 손예진 배우의 호연은 때때로 <비밀은 없다>의 연홍을 떠오르게 할 정도로 강렬하게 다가오는데, 매 작품마다 새로운 캐릭터, 새로운 연기를 그녀만의 색깔로 표현해내는 손예진 배우의 힘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자 강점처럼 다가오는 바. 현빈의 경우 대부분의 분량을 다른 인물과 호흡을 맞추기보다는 카메라 화면을 응시해야 하는, 자칫 굉장히 어색하고 어설프게 다가올 수 있는 연기를 무척 안정적으로 소화해낸다.
이렇게 배우들의 열연을 바탕으로 긴장감 있게 펼쳐지던 영화는 아쉽게도 중반부 이후 급격히 힘을 잃고 만다. 정확히 말하면 국정원에 청와대 안보실장까지 가세하는 등 영화의 판이 지나치게 커지면서부터 긴장감보다는 당혹감을 선사한다. 민태구의 전사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며 각계 인물들이 하나의 범죄에 연관되어 있다는 설정은 조금은 과한 무리수처럼 다가온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가장 황당한 것은, 냉철함을 유지하며 최고의 협상가로 인정을 받은 경위 하채윤이 영화에 등장하는 그 누구보다도 감정에 쉽게 동요되고 흔들린다는 점인데, 결국 협상을 이끌어야 할 채윤의 캐릭터가 그 힘을 잃다보니 결국 협상이라는 영화의 주된 소재까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만다.
더불어 태구의 가족사까지 등장하며 점점 더 산으로 가는 후반부의 전개는 더욱 황당하게 다가온다. 제아무리 인질극을 벌일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다고 하더라도 태구는 국산 무기를 불법으로 판매해온 무기 밀매업자이다. 마치 그럼에도 태구를 동정의 시선으로 봐주길 원하는 듯 이상한 플래시백, 이상한 감정 이입, 이상한 반전이 연이어 펼쳐지는 후반부는 이전까지 잘 쌓아온 영화의 장점마저 퇴색시킨다. 스릴러 장르로써 잘 흘러가던 영화에 신파적인 요소가 가미되는 것은 JK필름이 제작한 영화임을 새삼 상기시켜줄 뿐이다.
정리하자면 중반부까지는 채윤과 태구의 대립을 중심으로 긴장감을 나름 잘 조성했지만, 마치 판을 더 키워야만 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시달린 건지 얽히고설킨 관계가 과도하게 펼쳐지기 시작하면서 아쉬움을 낳고 만 작품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무엇보다 증거를 찾기 위해 피해자의 집을 찾은 혁수가 하필 앨범을 뒤지고, 그 앨범 속 사진을 보고 보육원을 찾아낸다는 전개는 해 해도 너무하지 않나 싶을 정도.. 결국 네 편의 한국 영화 중에서 무난한 정도에 그치고 만 <명당>이 가장 큰 만족을 선사했다는 점에서, <아이 캔 스피크>, <남한산성>, <범죄도시>가 경쟁을 벌인 지난해에 비해 올 추석 시즌은 영 아쉽게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