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볼거리로는 가릴 수 없었던 각본의 엉성함.
추석 특수를 노리고 개봉한, 이른바 빅4 영화 중 첫날 박스오피스 1위에 이름을 올린 그 영화 <안시성>을 관람하였다. 생각 이상으로 시사회 평이 좋아 구미를 당겼던 이 영화는 결국 영화를 보는 내내 '대체 시사회 이후 평은 왜 그리 좋았던걸까' 하는 의구심만을 잔뜩 남기고 말았다. 엉성한 각본을 화려한 볼거리로 애써 포장하고자 한, 2018년판 <명량>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달까.
영화는 당나라와의 전쟁이 벌어지던 고구려 시대, 20만의 군사를 이끌고 안시성 침공에 나선 당 태종 이세민에게 5천명의 군사로 맞서 승리를 거둔 이른바 안시성 전투를 모티브로 한다. 당시 안시성을 지킨 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만큼 역사에 기록된 정도만을 토대로 각색한 이 영화는,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과 그를 죽이기 위해 안시성으로 온 태학 생도 사물을 중심으로 안시성 전투가 벌어진 몇 달간의 서사를 압축해서 그려나간다.
결국 이 영화에서 관객들이 가장 기대하는 것은 '안시성 전투가 얼마나 거대하고 화려하게 묘사되었는가' 하는 부분일텐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바로 그 전투씬을 그려낸 연출만큼은 제법 인상적이다. 총 세 번에 걸쳐 펼쳐지는 전투 장면은 총 제작비가 200억에 달하는 대작임을 제대로 입증하며, 한국 영화에서 좀처럼 보지 못한 화려한 스케일을 즐길 수 있다는 의의만큼은 남긴다. 그런 만큼 단순히 액션을 기대하고 본 관객들에겐 충분히 만족스러운 영화로 다가올 듯하다.
하지만 이후 펼쳐지는 단점의 연속은 결코 화려한 전투 시퀀스로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영화는 한마디로 요약해서, 과잉으로 시작해 과잉으로 끝난다. 무엇보다 가장 두드러지는 단점은 액션 씬에서 시도 때도 없이 남발하는 슬로우모션 효과이다. 감독이 <300>으로 대표되는 잭 스나이더의 팬인지, 혹은 미드 [스파르타쿠스]를 인상깊게 본 건지는 모르겠으나 안시성에서의 첫 전투에서부터 정도를 모르고 계속해서 펼쳐지는 슬로우모션의 남용은 이전까지 잘 쌓아오던 영화의 몰입을 한순간에 깨뜨리고 만다.
또다른 단점은 클리셰의 향연이다. 이와 유사한 블록버스터 장르를 많이 본 관객이라면 이후의 전개를 뻔히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는데, 한 장면을 예로 들자면 양만춘과 사물의 대립이 펼쳐진 이후 양만춘이 적군에게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누군가가 뒤에서 적군을 공격해 양만춘을 살려낸다. 이때 대부분의 관객이 뒤에서 적군을 무찌른 이가 사물임을 뻔히 알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물의 등장을 슬로우모션으로 표현하니 황당할 따름이며, 더불어 그 누구라도 결국 사물의 간청으로 연개소문이 이끄는 군사들이 지원올 것임이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안시성은 더이상 희망이 없다는 듯 질질 끄는 후반부는 정말 짜증만을 야기한다.
한편, 음악의 활용 역시 어느 순간 과잉으로 느껴지는데 초반에만 하더라도 극의 긴장을 조성하는 데에 효과적으로 쓰이는 듯이 느껴지던 이 음악은 무척 격해지기 시작하는 중반부 이후부턴 그저 지나친 남용으로 느껴진다. 마치 영화의 음악을 맡은 윤일상 작곡가가 가요가 아닌 영화 음악도 이렇게나 잘 만들어낼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애쓴 게 아닌 가 싶을 정도. 클리셰로 얼룩진 각본이 전투가 펼쳐지지 않는 상황을 채워가는 대사의 어색함이나 상황 설정의 황당함 역시 실소를 유발하는 데에 그치고 마는데, 다른 건 그렇다치더라도 당나라 군대가 토산을 두 달에 걸쳐 만든 상황에서 안시성의 토굴꾼들이 열흘만에 토굴을 완성한다는 설정이나 마치 추적기라도 달린 양 목표를 향해 제대로 날아가는 마지막 화살의 향방은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다.
한편 양만춘을 연기한 조인성 배우를 필두로 배성우, 박병은, 엄태구, 오대환이라는 믿음직한 조연들의 연기는 굉장히 인상적으로 다가오며 그의 연기를 처음 접하는 만큼 기대보단 걱정이 앞섰던 남주혁은 우려보다는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물괴>의 혜리와 함께 언급되던 이 영화의 설현 또한 생각했던 것보다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이는 듯하면서도, 여성 캐릭터가 단 두 명만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굳이 아이돌 출신의 연기자를 캐스팅해야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