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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동 Dec 09. 2020

인간의 양면성에 대하여

삶 #4. 데미안 - 헤르만 헤세

그 시절에 대해 얘기하자니 문득 내면으로부터 수많은 냄새가 풍겨 와 슬픔과 상쾌한 전율이 나를 자극한다 … 거기에는 두 세계가 섞여 있었고, 두 극단에서 밤과 낮이 생겨났다. 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내가 잘 아는 그 세계는 대부분 어머니와 아버지, 자애로움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를 뜻했다... 이 세계에는 미래로 향한 곧은 선과 길이 있었고, 의무와 죄, 양심의 가책과 참회, 용서와 선량한 의도, 사랑과 존경, 성경 말씀과 지혜가 있었다. 삶을 맑고 순수하며, 아름답고 질서 있게 가꾸려면 이 세계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또 한 세계는 이미 우리 집 한가운데서 시작되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세계였다... 이 두 번째 세계에는 하녀와 직공들, 유령이야기와 추잡한 소문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끔찍한 일, 섬뜩하지만 호기심을 끄는 일,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다채롭게 벌어졌다. 도살장이나 감옥, 술 취한 사람들과 악다구니 쓰는 여인들, 도둑의 침입과 구타로 인한 살인, 자살 등이 횡행했다. 이 모든 아름답고도 섬뜩하며 야만적이고도 잔혹한 일들이 바로 주변에서, 가까운 골목이나 이웃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세상은 다른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어. 그런데 이 다른 것은 모조리 악마에 속하는 것으로 처리되어 있지. 그래서 세상의 이 온전한 부분, 이 온전한 절반이 은폐되고 묵살되어 버리는 거야… 난 우리가 모든 것을 숭배하고 성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해. 인위적으로 분리된 이 공식적인 반쪽 세상이 아니라 악마에게도 예배를 드려야 해… 아니면 자신 안에 악마도 포함하고 있는 신을 창조해야 할 거야.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들이 일어날 때 그분 때문에 이를 못 본 척 하지 않아도 되도록 말이야…”
우리 각자는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는지, 자신에게 무엇이 금지되는지 스스로 알아내지 않으면 안 돼, 사람은 금지된 것을 전혀 행하지 않고서도 엄청난 악당이 될 수 있거든. 그 반대도 마찬가지야. 사실 이건 그저 편안함 내지 안일함과 관련된 문제야! 너무 편안해서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판관이 될 수 없는 사람은 이미 존재하는 금지에 순응하지. 그게 편하니까 말이야. 반면 자신의 내면에서 스스로 계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어. 이런 사람들에게는 모든 신사분들께서 매일같이 행하는 일이 금지되고, 보통은 엄금되는 일이 허용되기도 하지. 누구나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거야.
그 순간 예리한 깨달음이 불꽃처럼 나를 태웠다. 누구에게나 어떤 '사명'이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사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내용을 고치고 멋대로 관리할 수는 없다… 깨어 있는 인간에게는 단 한 가지 의무 외에 다른 어떤 의무도 없었다. 그 의무란 자기 자신을 찾고, 자기 안에서 확고해지고, 어디로 향하는 더듬더듬 자신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든 참된 사명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뿐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헤세가 싱클레어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두 세계의 대립이 반복해서 드러난다.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허용된 아버지의 세계와 금지된 크로머의 세계. 하느님과 악마. 선과 악. 싱클레어는 '자기 자신을 찾고, 자기 안에서 확고해지고, 어디로 향하든 더듬더듬 자신의 길로 나아가는', 나에 대한 탐색과 정신적 완성의 과정에서 이 두 세계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갈등한다. 데미안이 보여주는 밝고 어두운 두 세계는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한 인간의 성장의 길에서 어떤 의미일까?


내가 생각하는 데미안의 가르침은, 내 안의 어둡고 부정적인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시작이라는 것이다.


내 내면의 부정적인 모습들, 내가 싫어하는 모습들을 인정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때때로 나오는 이기적인 행동. 배려할 줄 모르는 모습. 부모님에 대해 싫어하는 모습들 내가 물들어 심코 버릇에 드러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무언가에 대한 결핍과 열등감까지. 리고 나는 정말 고쳐야 할 부정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어두운 세계'의 자연스럽고 솔직한 감정의 표출까지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하여 '밝은 세계'의 이성으로 억누르려 했던 것 같다. 지나고 나면 별 것도 아닌 것에 대한 짜증이나 화. 누군가에 대한 미운 감정. 그때 그건 내가 아니라고 생각을 했었다. 아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 귓속에 프란츠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가 맴돌았다. 자기혐오와 자기부정이었다. 일종의 착한 아이 컴플렉스라 할까.


하지만 이제는 그 못난 모습들조차 나구나 생각한다. 부정적인 것들, 솔직한 감정 모두 온전히 나를 구성하는 일부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도 괜찮다고, 완벽하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고 생각을 해본다. 한편으로는 그 인정이 부족한 그대로도 괜찮다는 내 자존감의 밑바탕이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솔직함이 내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 잘못을 직시할 수 있는 유연한 사고의 밑바탕이 된다.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내 부정적인 방향의 가능성을 경계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자기 객관화가 안되면 꼰대가 되는 것이다. <결: 거칢의 대하여>에서 홍세화가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을 직시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 사용한 표현을 빌리자면, 회의할 줄 모르는, '완성된 자아'가 되는 것이다. 자신이 완성된 것으로 착각하고 내가 항상 옳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오류를 저지를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자신의 편협한 기준으로 온세상을 재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선한 본성을 갖고 태어나는가, 악한 본성을 갖고 태어나는가? 나의 답은 모든 사람은 선한 모습과 악한 모습을 둘 다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인간의 가능성이란 그런 백지와도 같은 것이다. 붉은 물감도 검은 물감도 얼마든지 칠할 수 있는 백지. 수천만 명을 죽인 히틀러와, 수많은 사람들을 구한 테레사 수녀, 그리고 내가 그렇게 크게 다른 종류의 인간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모두 선한 본성과 악한 본성을 동시에 지니고 태어나고, 그 사람의 개인적 경험과 사색, 그리고 그 사람이 마주한 사회적 분위기가 그가 어떤 삶을 살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에 각각 한쪽 발씩을 걸치고 살아간다.


그러니 그 누구도 특별히 선하지도 특별히 악하지도 않은 것이 인간이다. 나는 인간에게 선하거나 악한 고정적인 인격이 존재한다기보다는 내면에 있는 여러 복합적인 모습들 중 상황에 따라 보다 지배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 다면적인 인격 중 자신이 보다 더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선택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더욱이 나는 나를 계속해서 경계할 필요가 있다. 내 안에는 테레사 수녀도 존재하지만, 히틀러도 존재한다. 경계하지 않고 회의하지 않으면,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을 인정하고 개선해나가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엇나갈 수 있다. 내 안의 좋은 모습과 나쁜 모습 중 내가 원하고 사랑하는 좋은 모습을 더욱 드러낼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는 것이,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모든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라는 문장을 통해 전하고자 한 의미일 것이다.


모든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누구나 출생했을 때 묻은 찌꺼기를, 태곳적 점액과 알껍데기를 죽을 때까지 지니고 다닌다. 끝내 인간이 되지 못하고 개구리나 도마뱀, 개미로 머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지향점을 향해 자연이 던진 존재가 바로 우리들인 것이다. 우리 모두의 근원, 우리의 어머니는 동일하다. 우리는 모두 같은 심연에서 나왔다. 하지만 심연으로부터 시험 삼아 내던져진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각자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해석할 수 있다.


'우리 각자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인간과 세상의 양면성을 이해해야 한다. 절대적인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기준은 상대적인 것이며, 시대에 따라서 또한 판단의 주체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주관적인 선과 악은 존재하고, 그 주관적 선악의 기준과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 인격적 성장의 큰 부분이다.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 '개구리, 도마뱀, 개미'에서 머무르지 않고 인간, 어른이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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