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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동 Dec 08. 2020

인간은 변화할 수 있는가

삶 #3. 결: 거칢에 대하여 - 홍세화

나를 짓는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은 고결함을 지향한다... 그는 '회의하는 자아'다. 회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를 짓는 자유는 무의미하다. 고쳐 짓거나 새로 지을 게 없는, 이미 완성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유인이 '회의하는 자아'로서 지향하는 고결함은 제로섬게임이 적용되는 고귀함과 다르다... 고결함은 남과 경쟁하여 승리한 자의 몫이 아니라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의 산물이며 선물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면서 자기 성숙의 긴장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 고결한 존재의 조건일 것이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것이 고결함인데,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갖거나 우월하다고 가정된 집단에 속하기 위한 경쟁 속에서 나를 짓는 자유를 방기하고 있는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사람은 현존재를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스피노자의 말이다. 우리는 사람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변하지 않을까?... 회의하는 자아는 회의하는 자아인 채로 변하지 않고, 회의하지 않는 자아는 회의하지 않는 자아인 채로 변하지 않는다. 세상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후자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회의하는 자아가 자기 의지로 자신의 사유세계를 열어 자기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나를 짓는 자유를 누린다면, 대부분은 자신의 사유세계를 닫은 채 머물러 있음으로써 나를 짓는 자유를 누리지 않는다. 사유세계의 문을 닫은 채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사유세계의 문이 닫혀 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자신이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른 양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반면에 회의하는 자아는 자신이 완성 단계에 이르기는커녕 언제나 부족하다는 점, 수많은 오류에 빠져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끝까지 회의하는 자아로 남게 되며 사유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둔 채 살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죽는 순간까지 완성된 존재가 될 수 없다. 소박한 자유인에게 긴장의 일상은 필수적이다. 불현듯 스스로 아름다워지거나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은 순간이 다가올 때 겸연쩍어하거나 외면하는 대신, 그 순간을 껴안고 삶의 변곡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바라보는 나 자신과의 소리없는 대화가 필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존재라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는 물음을 부단히 던져야 한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생각들은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 사회화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서, 정리되어 있거나 아니거나 내 삶의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이 담겨 있으므로 내 삶의 지향을 규정한다... 다시 말해, 내가 갖고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 삶의 지향을 규정하는 내 생각을 내가 어떻게 형성했는지 묻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그런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생각하는 존재라기보다 '생각하지 않은 생각'으로 충만하고 그것을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이것이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른 듯 살아가는 사람들의 양태다.


인간은 변화할 수 있는가, 라는 제목에 대한 답부터 내리자면, 그렇다. 인간은 변화할 수 있다. 아니, 인간은 인간이기 위해서는 변화하여야 한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에 인간관계에 관한 진실의 상당한 부분이 담겨있다고 느낀다. 다만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의 의미는, 친구든 연인이든 가족이든 어떤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기대를 투영하여 상대방을 바꾸려고 해선 안된다는 것으로 해석하여야지, 인간은 타고난 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그 타고난 것은 노력해도 바뀌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으로 곡해해서는 안된다. 상대방을 고쳐쓸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변화할 수 있다.


물론 성격이나 인격에서 유전이나 환경, 예를 들어 가난, 가정 불화, 부모님에 대해 싫은 점, 이런 타고난 것들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인간의 성장에서 유아기와 가정환경의 영향이 참 중요하다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예를 들어, 어릴 적 가정폭력을 겪은 아이는 성장하여 자신이 당한 가정폭력을 대물림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하여 가정폭력을 당한, 그리고 그것을 대물림한 사람의 책임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감정적으로는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노력해야 할 사회의 책임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그의 것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은 본인만이 질 수 있다.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 불행한 가정환경을 자신의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을 책임은 본인만이 온전히 질 수 있다.


우리는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죽는 순간까지 완성된 존재가 될 수 없다. 당연하지만 우리들이 종종 잊곤 하는 말이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다. 달리 말해, 우리의 인격에는 언제나 개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결: 거칢의 대하여>의 저자 홍세화는 우리들이 너무 많은 경우 완성된 자아, 아니 스스로 완성된 척하며 자신의 사유세계를 닫아둔 채 자신을 짓는 자유를 누리지 않는 자아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완성된 자아는 생각하지 않고, 회의하지 않는다. 내 말이 다 옳으니까. 내가 틀릴 리 없으니까.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 가능성에 대해 회의하지 않으므로 변화 할리 없다. 선채로 굳어 있고, 그 자리에 머무른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를 실현하기 위해 무식한 놈이 용감하다를 실천한다.


반면 회의하는 자아는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에 대해 인정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들에 대해 끊임없이 사색하고 의심한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의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둔다. 자신이 틀렸다면 언제든지 설득될 수 있는 유연함을 갖고 있다. 흑백논리에 빠져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집단논리에 매몰되어 옳고 그름을 분간하는 눈이 흐려지지 않는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므로, 인간이 만든 이 세상의 어떤 문제에도 완벽한 정답과 오답, 정의와 불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나이가 드는 것이 두려웠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늙어간다는 것이고, '늙어간다'는 말의 유의어가 '굳어간다', '머무른다', '닫힌다'와 같은 단어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변화하지 않고 고정된, 자기가 항상 옳다고 우기는 꼰대가 되기 너무 싫고 두려웠다.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걸까 생각했다. 되돌아보면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회의하지 않는 자아, 스스로 완성된 것으로 착각하는 자아가 되는 것이었나 보다. 그래서 다시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도 늙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영원히 완성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으로써 죽을 때까지 '회의하는 자아'였으면 좋겠다.


어른들이 이런 말을 많이들 한다. "난 원래 그래. 사람은 원래 나이 들면 잘 안 바뀌어." 웃기지 마라. 세상에 원래 그런 게 어디 있나? 실제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뇌의 가소성(neuro-plasticity)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죽기 직전까지 계속된다. 나이가 들고 나서도 뇌의 신경세포는 계속해서 생성되며 뇌의 회로도 계속해서 바뀐다는 것이다. 사람의 인격과 행동은 노력 여하에 따라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회의하는 자아로서 자신의 삶과 인격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끌어갈 책임은 온전히 본인만이 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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