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일 인생 최대 시련을 겪은 누군가를 만난다. 밤 10시가 다 돼서 전화가 왔는데 목소리가 다 죽어가길래 날이 밝으면 무조건 보자고 했다. 눈으로 상태를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본인이 수습할 수 없는 과오를 범했던 터다. 내가 먼저 보자고 했지만 편치 않은 그 자리에 가기 앞서 몇 가지 원칙을 세우고자 한다. 적어보면 조심하고 철저할 수 있으니.
1. 주제가 아닌 소재에 대해서만 조언한다.
이번에 그가 겪은 일은 나로서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고통과 자책의 시간임이 분명하다.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괴로울 그에게 나는 내일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을 것이다. 금세 이 사실을 잊고 주저리주저리 내뱉는 말은 모두 안 하느니만 못할 말들일 것이다. 당사자로서 이번 일을 나보다 천 배는 더 고민했을 그에게 아무리 나의 확신이 강하게 들더라도 함부로 주입해서는 안 된다. 다만 중간중간 화제가 바뀐다면 마음껏 나의 생각을 전하고자 한다. 이것이 평소 그를 만나는 나의 모습이고, 익숙한 장면 속에서 그가 잠시나마 편안함을 느끼길 바라기 때문이다.
2. 잘못을 지적한다.
나는 그를 변함없이 아끼지만 그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처벌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아끼는 사람의 괴로워하는 모습에 휘둘려 그의 행동을 마냥 지지하는 것은 그의 삶에 일절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일방적으로 나의 편이 돼주길 바라는 성향의 사람도 아닌데다 지금 그가 온 힘을 쏟아 반성하는 시기를 보내는 데 훼방을 놓고 싶지 않다.
3. 내 경험을 함부로 끄집어내지 않는다.
그보다 내가 더 오랜 사회생활을 했다고 해서 나의 경험이 더 풍부하다고 할 수 없다. 결이 다른 이야기로 공감을 표현하는 것은 나를 치장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새삼 돌아보건대 그와 종종 만나며 공감을 표하고 싶을 때마다 나의 지난 경험을 수시로 이어붙였던 것 같다. 내일만은 자제해야 한다.
4. 꼭 하고 싶은 말은 행동으로 전한다.
밥을 사준 뒤 개봉하지 않은 영양제를 줄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건강은 챙겨라'는 말을 꼭 전하고 싶어서다.
5. 다음 약속을 잡는다.
다음 약속을 잡아 그가 이 시간을 잘 견디는지 간격을 두고 확인해야겠다. 그가 누구나 갖고 있다는 회복탄력성을 어떻게든 발휘하기를 바랄 뿐이다.
내일 나는 그를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노력도 무의미할 것이다. 나는 허공에 흩어질 말을 굳이 하지 않으려 할 것이고, 그는 가만히 자신의 절망이 얼마나 인이 박였는지 말할 것이다. 체념과 체념이 만나는 내일 그 자리에서 기적적으로 이 시간을 견딜 힘이 미세하게나마 움텄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