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가 수상 소감에서 자신이 작품을 쓰는 경험을 묘사한 말이다. 그에게 소설 집필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이어가기 위한 여정이었던 것. 내가 주목한 점은 그에게 소설을 집필하는 시간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답이 찾아지는 시점이 아니라 '질문이 끝날 때' 비로소 소설을 맺을 수 있었다고.
보통 묻는 이와 답하는 이가 분리된 채 오가는 질문은 답을 요구한다. 사전적 의미를 봐도 질문은 '앎을 얻기'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답을 취하면 곧 소멸한다. 반면 자문은 그저 스스로 묻는 데 그치더라도 조건이 성립하는 행위다. 답이 없으면 없는 대로 지속되면서 답을 찾지 못하는 주체를 때때로 괴롭히며, 몰두하게 하며, 좌절하게 하며, 힘을 북돋우며 그럭저럭 물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기능한다. 이러한 자문의 기능에 주목하고자 한다.
의식을 수조에 담긴 물이라고 할 때, 질문은 '부유물', 자문은 '침전물'의 속성을 가졌다. 수면으로 떠올라 공기층과 만나 산화되는 부유물보다 오래도록 수조 밑바닥에 가라앉아있는 침전물이 물의 주성분을 결정한다. 침전물 중 뒤늦게 부유물로 전환되는 성분도 있겠으나, 쪼개고 쪼개도 오래도록 부식되지 않는 침전물들이 각자의 의식을 더 잘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문 즉 스스로 답을 얻지 못한 물음들이 어떻게 나를 이루고, 나아가게 하고 있는지 파고들어 보고 싶다. 그리고 이 여정을 글로 빚고자 한다.
우선 지금 나를 움직인 자문은 다음과 같다.
글쓰기에 대한 나의 지식과 애착이 독자를 도울 수 있는가? 그 결과가 나에게 심리적, 경제적, 사회적 성취를 보장하는가?
글쓰기에도 맷집이 필요하다. 어떤 일정에서든, 어떤 심리 상태에서든, 어떤 처지에서든 글을 쓰고 스스로 좌절하면서도 문장을 덧대가는 능력을 나는 "글을 쓰는 맷집"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 역량을 기르기 위해 내일부터 1시간 30분이라는 시간과 1000~1500자의 공간을 글쓰기로 채울 것이다. 글감에 촉을 세우고 수시로 쓸 문장을 저장하지 않으면 불가한 일이다. 결국 '일상에 글을 쓰는 리듬을 반드시 끼워 넣겠노라'라는 말을 요란하게도 이야기했다. 스스로 다그치기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꿋꿋이 요란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