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takes a village to raise a child."
아프리카 속담에 "It takes a village to raise a child."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데 온 동네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뜻인데, 이는 미국 이민 1세대인 저희 가정에 딱 들어맞는 말입니다. 한국에 살았으면 저희 아이들은 근면성실하고 늘 낙천적인 제 친정 부모님과 애정표현이 넘치시는 시부모님들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자랐겠지요. 생일이나 명절, 입학, 졸업 등 특별한 날이면 용돈도 두둑이 받는 행운도 맞보고요. 하지만, 미국에 15년째 살다 보니 한국의 명절은 그냥 지나칠 때가 많고 입학, 졸업 때도 단출히 저희 네 식구뿐입니다. 대신 이웃과 지인들이 저희 부부와 함께 아이들을 양육합니다.
미국 학교에서는 매년 신학기 시작할 때 즈음에 학생부 업데이트를 요구하는데, 여기에 가까이 사는 친척을 비상연락처로 지정해야 합니다. 저희 가족의 경우는 비상시 저희 부부가 연락이 닿지 않을 경우 옆집 아줌마 M에게 연락이 가도록 돼 있습니다. 옆집 아줌마는 저희가 지금 사는 집으로 처음 이사 왔을 때, 크래커, 잼, 말린 과일 등을 푸짐하게 담은 바구니로 저희를 환영해 주셨던 분입니다. 여행을 가실 때면 저희 아이들에게 쓰레기통 들여놓기, 집 마당에 있는 온수 욕조에 세제 넣기, 택배 상자 챙기기 등의 소소한 일거리를 주십니다. 여행 후에는 저희 아이들에게 주실 기념품을 챙겨 오시고, 졸업식을 기념해 아이스크림 기프트 카드도 주십니다. 14살인 저희 둘째가 작년 가을부터 동네에 사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한 번 첼로를 가르치는데 이 일도 옆집 아줌마가 페이스북에 올라온 구인공고(배울 학생이 아직 초보 단계이기 때문에 고등학생 첼리스트를 선생님으로 고용하길 원하심)를 보고 제게 보내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남편 대학 동문 모임에 자주 나갔습니다. 동문 자녀들이 대개 초등학생 나이였는데, 경치 좋은 곳에 피크닉을 가서 팟럭이나 바비큐 파티를 합니다. 여름이면 빅서 같은 바닷가로 1박 2일 캠핑도 갔습니다. 많아야 1년에 2-3번 보는 사이지만 아이들은 매일 보는 학교 친구처럼 서스름 없이 잘 뛰어놉니다. 귀차니스트인 저희 부부가 혼자였다면 바비큐 파티에 캠핑은 어림도 없습니다. 아마 예약도 못했을 거라는데 한 표 겁니다. 아이들은 동문 가족들과 음식을 나눠먹고 온종일 한국말을 듣고 말하며 외국사는 외로움을 달래고, ‘한국인의 정’을 느낍니다.
미국 학생들은 중고등학생이 되면 학교 공부 외에도 음악, 운동, 코딩 등 다양한 활동을 하기 때문에 매우 바빠집니다. 아이들이 커가며 동문 모임은 차츰 줄어들고, 이제는 남편 직장 동료들과의 교류가 많아졌습니다. 남편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지만 논문을 1년에 한 편 정도 꾸준히 쓰고 있는데, 자신과 함께 논문을 쓰는 공동 저자들을 무척 좋아하고 아낍니다. 두 분 다 나이는 남편보다 한참 아래지만, 인성도 훌륭하고 매우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한 분은 작년 말 스타트업을 직접 차리려고 퇴사했습니다. 이제 자주 못 보게 돼 아쉬운 마음에 저희 집에 초대해 저녁을 같이 했어요. 이 저녁 식사에는 남편이 좋아하는 사람을 대접한다는 취지도 있었지만, 저희 아이들이 직업을 구할 때 ‘회사 취직' 뿐만 아니라 ‘사업'이란 옵션도 있다는 걸 깨달았으면 하는 제 개인적 바람도 한 스푼 넣었습니다.
가까이 사는 가족이 없어 이웃, 지인들에게 자연스레 의지해 왔는데, 예상치 않게 저희 육아 방식을 유명하신 분들도 쓰고 계셨더라고요. 얼마 전 유전자 분석으로 유명한 23andMe의 설립자 앤 워치츠키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스탠퍼드대 교수여서 대학 캠퍼스 근처에 교수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 살았고, “아버지 동료들 주변에서 자라며 자신도 자연스럽게 지적 호기심이 커졌다”라고 합니다. 앤에게는 언니가 둘 있는데, 첫째 언니는 유튜브 전 CEO 수잔이고, 둘째 언니 재넷은 유명 대학병원 의사입니다. 수학계의 노벨상 필즈상 수상자인 허준이 교수도 한 인터뷰에서 “딸을 잘 키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집에서 지인 모임을 자주 갖는다"라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저와 남편은 둘 다 IT업계에 종사하고, 아주 진취적인 스타일도 아니라 저희가 아이들에게 직접 보여줄 수 있는 세상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주변의 지혜를 모은다면 자녀양육에서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저희 두 아들을 함께 키워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저도 그들의 삶에 작게나마 보탬이 됐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