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키고 싶은 자와 하기를 거부하는 자(2)
Teachable moment
지난번에 '시키고 싶은 자와 하기를 거부하는 자'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었는데요. 오늘은 '시키는 자와 거부하는 자 2탄'입니다. 자~~ 그럼 퀴즈 들어갑니다. 오늘의 '시키는 자'와 '거부하는 자'는 각각 누구일까요? 그리고 뭘 시키려는 것일까요? 저는 살짝 성격이 급해서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정답 공개하겠습니다. 여기서 '시키려는 자'는 제 남편이고 '거부하는 자'는 바로 저입니다. 정답 맞히셨나요? 저희 남편이 제게 시키려는 건 바로 '문제 풀기'입니다. 보통 부부 관계에서 벌어질만한 일은 아니죠. 저희 부부의 이상한 티키타카가 궁금하신가요?
저는 올초부터 재취업을 위해 코딩 인터뷰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시간을 데이터 구조와 알고리즘 공부하는데 쓰고 있지요. 저는 문과 출신인 데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수포자여서 수학의 기본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수학머리가 1도 없어요. 알고리즘의 상당 부분이 수학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보통 개발자들보다 학습이 많이 느린 편입니다. 얼마 전 바이너리(이진법 - 컴퓨터는 모든 것을 0과 1로 표현합니다)를 공부하다 '보수'라는 개념이 나왔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개념이었습니다. 원래 컴퓨터에는 덧셈만 연산이 가능하도록 디자인됐는데, 덧셈을 갖고 뺄셈을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보수'입니다.
개념도 어렵고 답을 봐도 영 이해가 안 가 오랜만에 남편 찬스를 썼습니다. 남편은 역시 개발자 25년 경력답게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예제까지 들어 상세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설명을 마친 남편은 "이제 문제 몇 개 더 풀어보면 바이너리, 보수는 확실히 알겠네"라고 코멘트를 합니다. 저도 "알겠어요"라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인사를 한 후 노트북 화면을 살포시 닫습니다. 시간은 이미 밤 10시가 다 돼가고, 제 머리는 '바이너리, 보수'를 이해하기 위해 이미 과부하 상태가 된 후입니다. 평소 같았으면 1시간 전에 이미 공부 마무리에 들어갔으나, 남편의 도와주려는 마음이 기특하기도 해서 상당한 의지로 버티고 있던 상황이었지요.
제 평소 지론은 "공부가 지루하기 바로 전에 멈추기"입니다. 이게 무슨 개똥철학이냐고 하실 분도 계시겠습니다만. 저는 그렇습니다. 머리가 흐리멍덩한 상태에서 30분 더 공부하느니 다음 날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면 효과가 더 좋다고 믿어요. 공부를 마치고 방에 들어가 유튜브를 봤습니다. 뇌과학자 박문호 박사님의 숏츠를 보고 있는데 남편이 지나가면서 뭐 보냐고 묻습니다. "학습한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면 잘 안 잊어버린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남편은 이때가 바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문제를 많이 풀어보면 절대 안 잊어버려"라고 말하네요.
아마 남편은 제가 컴퓨터 모니터 끌 때부터 계속 이 말을 하고 싶어 마음에 품고 다녔던 게 틀림없습니다. 20년 가까이 부부로 살아오며 남편은 '와이프와 평화 유지법'을 확실히 깨쳤습니다. 피곤하다는 사람 붙잡고 잔소리해 봤자 씨도 안 먹히니 훈계할 타이밍(teachable moment)을 계속 노리는 거죠. 가르치고 싶은 남편의 절절한 마음이 느껴져 다음날 아침 세수도 안 하고 책상에 앉아 바이너리 뺄셈을 보수로 계산하는 문제를 스스로 내고 풀어봅니다. "자기야, 이제 행복해???"
가끔은 너무 완벽주의를 추구하고 집요한 남편이 피곤합니다. 하지만, 이거 말고 나머지는 다 평타 이상인 아주 훌륭한 남편입니다. 운이 나빴으면 가정폭력범, 바람피우는 남자 등 이상한 남자랑 결혼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너무나 정상인 남편을 제게 보내주신 온 우주에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