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의 근육
첫 단추는 중요하다. 특히 커리어의 시작은 더더욱. 내 사회생활의 시작은 PR 에이전시(agency)였다. 그곳은 참 고되어 모두가 선망하는 출발점은 아니었지만, 나는 언제나 PR업을 에이전시에서 시작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PR의 A to Z를 차근차근 배웠을뿐더러, (당시에는 사실 잘 몰랐지만) 일을 하다 보니 무기가 되는 경험들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외주업체의 입장에서 일해보는 것이었다. 우리는 클라이언트, 즉 기업 홍보실(인하우스 PR이라고도 부른다)의 일을 맡아 진행했다. IT부터 소비재, 공공 등 다양한 분야의 PR을 대행한 덕에 여러 유형의 클라이언트를 만났고, 나쁜 (태도를 가진) 클라이언트와 좋은 클라이언트를 구분하는 나 나름의 기준이 생겼다.
좋은 클라이언트는 마치 내 브랜드처럼 클라이언트의 일을 하게 만들었다. 예쁜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은 진짜 맞았다. 당시 적게는 3개 많게는 5개의 클라이언트를 동시에 맡았는데, 좋은 클라이언트의 브랜드는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보게 되더라는.
기업 홍보실로 옮긴 후 외주업체와 협력할 기회가 여럿 생겼다. 그럴 때마다 에이전시 때 나를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던 좋은 클라이언트들의 공통점을 떠올렸다. 그리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최소 그 원칙들만은 지키자고 다짐했다. 그래서인지 함께 일했던 외주사 담당자들과 업무 종료 후에도 계속 연결되는 케이스들이 생겨났다. 이번 콘텐츠는 외주사와 소통할 때 지키고 있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원칙들에 대한 이야기다.
좋은 클라이언트는 언어가 달랐다. 그들은 "대리님이 전문가시니까요. 믿고 가겠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고, "대리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라고 자주 물었다. 우리를 자신들이 시킨 일을 정말 '대행'하는 사람처럼 대하는 클라이언트가 있었던 반면, 좋은 클라이언트는 우리의 의견을 경청하고 선택과 결정을 존중했다.
믿음과 신뢰의 언어는 언제나 강력하다. 나는 나를 믿어주는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더 도움이 될 일은 없는지 업무 외의 시간을 써서 고민하곤 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대한 클라이언트의 업무는 PR 성과가 좋게 나올 수밖에 없었고 장기 계약으로 이어졌다.
외주사는 그 분야의 전문가다. 그래서 비용을 지불하고 일을 맡긴다. 그들의 전문성에 대한 존중이 기본이다. 클라이언트가 시키는 일을 수동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 그 차이가 결과물을 다르게 만든다. 그리고 그 차이를 만드는 출발점에는 존중의 언어와 태도가 있다.
좋은 클라이언트의 피드백은 오해할 여지없이 깔끔하고 명확했다. 나쁜 클라이언트는 두루뭉술하게 피드백을 준 후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 같다며 결국 두 번 세 번 수정하게 만들었다.
존중의 언어를 쿠션어*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쿠션어는 명과 암이 있어 사용에 주의가 필요하다. 적절한 쿠션어는 딱딱한 커뮤니케이션에 윤활유 역할을 하지만 과한 쿠션어는 해석에 불필요한 시간을 들이게 만들고, 잘못 해석이라도 하면 한 번에 끝낼 일을 몇 번이고 다시 하게 만들기도 한다.
외주사에 피드백을 줄 때는 수정 사항을 단도직입적으로 전달한다. '나쁘진 않은 것 같아요' 보다 '다른 안으로 한번 더 생각해 주세요'가 좋다. 그 순간의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괜한 쿠션어를 쓰지 말자. 지름길로 갈 일을 굳이 힘들게 돌아서 가게 할 필요는 없다.
*쿠션어 : 상대방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핵심이 아닌 돌려서 말하는 완곡한 표현.
그 분야를 잘 몰라서 외주사에 일을 맡긴 것이라 하더라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정도의 기초 지식은 있어야 한다. 개발을 직접 할 수는 없어도, 디자인은 할 줄 몰라도, 똥인지 된장인지 가려내는 '눈'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 지식이 없으면 자신의 판단에 확신이 없기 때문에 의사결정에 딜레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결정이 늦어지면 외주사는 다음 스텝을 진행하지 못한다.
회사 사이트 구축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할 때, 뼛속까지 문과생인 나는 '비전공자를 위한 이해할 수 있는 IT지식', '웹디자인 교과서' 등의 책으로 공부를 했다. 그렇다고 대단히 심오하고 어려운 지식을 얻은 것은 아니었지만 책 몇 권을 읽으며 터득한 지식으로 개발자, 디자이너와 그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소통할 수 있었다. 수월한 소통은 커뮤니케이션 비용을 줄여준다.
모던한 스타일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얼마나 다를까. 10명의 사람이 있다면 아마 모던함에 대한 10개의 정의가 나올 거다. 디자인 스타일은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생각의 차이를 좁히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때 빠르게 동상이몽을 줄여주는 것이 레퍼런스(샘플)다. 비주얼적인 결과물이 나와야 하는 경우에는, 원하는 스타일을 정확하게 반영한 샘플을 찾아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로 소통하는 것이 안전하다. 단, 클라이언트가 제시한 레퍼런스는 제작자의 생각을 가둘 수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방향을 맞추기 위함일 뿐, 더 좋은 안이 있다면 제안해 달라"는 요청도 함께 하는 편이다.
좋은 클라이언트는 함께 고민해 보겠다는 말을 많이 했다. 고민을 하는 것, 고민에 대한 결과를 주는 것은 사실 우리(에이전시)의 일이었지만, 설령 그것이 말뿐이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함께 고민하겠다'는 말이 원팀으로 일하는 것 같아 든든했고 힘이 났다.
이후, 나도 외주사가 기획 단계에서 좀 막막해하거나 이슈가 생겼을 때, 같이 고민해 보고 대안을 적극 제시하게 됐다. 클라이언트와 외주사는 물리적으로 분리돼 있지만 한 배에 탄 사람들이다. 최고의 결과물은 결국 팀워크에서 나온다는 걸 외주사와 일할 때도 잊지 않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