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의 근육
우리에겐 롤모델이 아니라 레퍼런스가 필요하다
일을 하면서 답을 찾지 못해 막막하던 순간, 길을 잃고 헤매던 순간에, 나는 레퍼런스를 찾았다. 한 명의 롤모델보다는 내가 처한 상황에 맞는 레퍼런스가 필요했고, 수많은 레퍼런스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단서들을 발견하곤 했다.
지난 주는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이 있는 주간이었다. 작게나마 내가 있는 곳에서 다른 여성들과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했다. 직간접적으로 내게 좋은 레퍼런스가 된 여성들을 떠올리며, 커리어 여정에 영감을 준 그녀들의 말을 나누고자 한다.
커리어 경력이 9년에서 10년으로 넘어가던 해 유난히 고민이 많았다. 1년에서 9년까지는 기술을 체득하는 시기라 성실하고 꾸준하게 실무 역량을 갈고닦으면 됐지만, 10년 차부터는 분명 기술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업계 네임드라 불리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렇게 찾아낸 그녀들의 공통점은, 시그니처 어치브먼트(signature achievement)였다.
식당이나 브랜드만 시그니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사람만의 상징적인 업적, 시그니처가 있다. 10년 차부터는 (일을 잘하는 것은 당연하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OOO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를 만들어야 한다. 시그니처 어치브먼트는 대체불가능함을 만드는 강력한 무기다.
스타트업에 다닐 때 우리에겐 제약이 많았다. 돈과 사람은 부족했고 일정은 충분치 않았다. 그럼에도 성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 매우 압박적이었다. 스타트업 입사 초반에는 모든 것이 풍족해 보이는 대기업의 성공 사례들을 보며 패배주의에 빠졌던 순간들도 있었다. "생각하고 숙고하는 시간만큼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말은 프로젝트에 대한 마인드를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모든 프로젝트에는 저마다 한계가 존재하고(프로젝트의 태생적 한계라 생각하기로 했다), 예산마다 답은 숨어 있다. 그 답을 찾아내는 건 결국 얼마나 몰입해 프로젝트에 매달렸는지에 달려있다.
연차가 쌓일수록 중요하게 평가받는 역량 중 하나가 문제 해결력이다. 주니어 때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어진 업무만 잘 해내면 됐지만, 중간 관리자부터는 매일 같이 풀어야 할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문제를 잘 해결한다는 것이 당최 어떤 의미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던 때 이 문장을 만났다. 문제는 1차원이 아니라 3차원에 가까워서, 정면만 바라보면 절대로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여러 측면을 종합해서 봐야 비로소 문제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지레 겁먹기보다는 상황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최대한 잘게 쪼개어 보는 습관이 생겼다.
정말 신기하게도 20년 이상 현업에서 롱런하는 여성들은 빠짐없이 '체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문성후 박사의 책 <리더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서도 리더십을 무너뜨리는 다섯 가지 무(無) 중 하나로 '무기력'을 꼽으며 "체력이 리더십의 질을 결정한다" 말한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옳은 판단과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기도 하다. 일을 잘하려는 노력만큼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몸의 상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이유다.
나의 경우 최소 주 3회는 운동을 한다. 예전에는 야근 때문에 운동을 빼먹는 일이 잦았는데, 지금은 집에 일을 가져오는 한이 있더라도 운동을 해야 하는 날에는 운동을 먼저 하고 일을 끝낸다. 저녁 미팅 등으로 피치 못하게 운동을 하지 못하면 출퇴근 길 계단을 활용해 생활운동이라도 한다.
"내가 먹는 것이 나"라는 말을 잊지 않으려고도 한다. 몸에 최대한 좋은 것을 넣어준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몸에 좋은 것보다 좋지 않은 것들을 먹게 될 때가 더 많다. 중요한 건 옳은 것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균형의 자세'다. 예를 들어 점심때 탄수화물을 과다하게 먹었다면 저녁 때는 샐러드를 먹는다거나, 야식을 먹었다면 다음 날 점심까지는 단식을 해주는 식으로. 몸은 정신에, 정신은 몸에 영향을 준다. 체력을 위해서는 스트레스 관리도 중요하다. 좋은 사람, 좋은 생각들을 곁에 두며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나만의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만들어 감정의 찌꺼기가 쌓이지 않게 날려 보내는 일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