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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계에이방인 Jan 01. 2024

모든 시작엔 끝이 있다

2022년 UTNP 9peaks 두번째


선을 넘다.

이 선을 넘으면 선택지는 딱 두가지다. 포기하느냐 아니면 다시 이 선을 넘어 오느냐. 무엇이 될지는 나도 모른다. 지금 보다 앞선 시간들에 대해선 알길이 없다. 시간위를 달리며 겪는 방법 밖엔 없다. 하지만 알수 있는건 단 한가지다.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는거.


2022 UTNP 공식 사진

출발 하자마자, 아니 출발선만 지나면 바로 오르막이 시작이다.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게 호흡에 맞춰 한발씩 내딛는다. 9개의 산들중 이제 겨우 시작이다. 날씨가 아주 가을날씨의 절정을 보여준다. 맑고 쾌청한 공기. 표현할수 없을만큼 새파란 하늘. 그위에 떠다니는 구름. 붉은 단풍들. 가을의 기운들을 온몸으로 느낀다. 이 순간만큼은 두려움도 고통도 모두 사라지는 상태다.  언제까지고 이 기분을 느끼고 싶다. 하지만 이런 각성 상태는 곧 사라진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는 순간 내몸은 내몸이 아니기를 바라는거 처럼 내 의지와는 다르게 반응한다. 허벅지에는 피가 몰려 타들어가는 듯 하고 심장은 요동을 치며 금방이라도 떠질듯 가슴을 강타한다. 진정되지 않는 폐는 거칠게 입밖으로 이산화탄소를 뿜어내기 바쁘다. 그럴때면 늘 떠오르는 생각. ‘내가 왜 이짓을 하고 있지?‘ 언제나 그렇듯 나도 모르겠다. 알거도 같았는데 이 순간에는 늘 알수가 없다. 혹여나 알았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더 편하지는 않을거 같다.



장거리를 달리다보면 꼭 듣는 질문들이 있다. ‘어떻게 그렇게 달리나’ 대게 달린다고 하니 쉼없이 달릴거라 생각하지만 100km이상 장거리는 달리면서 회복을 해야한다. 엘리트 선수들도 회복 구간들이 있다. 걸어가는 구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엘리트 선수들 외에는 걷는 구간들이 더 길어진다. 하지만 마냥 걸을수는 없다. 제한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제한 시간안에 각 구간을 통과하지 못하면 실격이다. 달릴수있는 구간은 어떻게든 달려서 시간을 확보해야한다. 계속 달리지는 못 하지만 마냥 트레킹 처럼 산책하듯 걸을수도 없다는 거다.

제한시간 안에 9개의 산을 넘어야 한다. 아무리 열심히 뛰고 걸어도 시간은 내 뒤를 바짝 쫓아 온다. 시간에게 잡아 먹히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뛰고 걸어야 한다. 흥분해서도 않되고 불안해 해서도 않된다.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페이스가 흐트러지지 않게 견뎌야 한다. 자제력이 필요하다.


2022 UTNP 공식 사진




밤이 찾아온다. 장거리 달리기에서는 피할수 없는 상황이다. 주로에서 밤을 맞이 했다는건 하루종일 뛰어 왔지만 여전히 더 뛰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몸은 피로에 지쳤다. 산속의 밤은 우주처럼 깜깜하다.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 내 숨소리만 들린다. 달리다 문뜩 멈춰서면 놀라울만치 고요하다. 이제부터는 피로와 추위와의 싸움이다. 관절이 아픈것도 아니라 숨이 차는것도 아니다. 추위와 쏟아지는 졸음과의 사투가 시작된다.


아무것도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로지 발앞의 헤드라이트 불빛만 보고 걸을 뿐이다. 가끔이 눈이 감겨 비틀거린다. 산에서 잘못 헛디디면 아래로 굴러 떨어질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공포보다 졸음은 더 강력하다. 차라리 굴러 떨어져도 좋으니 누워서 잠들고 싶다.

한계에 도달하는 순간이다. 내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정신의 한계까지 넘어가는 중이다. 이 순간이 너무 고통스럽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만 너무나도 짜증스럽다. 분노가 머리 끝까지 밀고 나온다. 고통의 정점. 더이상 아무 생각도, 아무 느낌도 없다. 그저 앞으로 간다. 시간의 흐름도 무감각 해진다. 의미 같은건 없어진다. 그저 해야 할일을 마땅히 해나간다. 아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미 산을 넘어갔다.


동이 뜨기 시작한다. 하늘이 점차 붉게 물들어 간다. 이제 추위도 사라지겠질 것이다. 햇볕을 받으며 밝아지는 시야. 살아남은것 같은 안도감. 새로 시작되는 기분이다. 다시 다릴수 있는 기운이 생긴다. 묘하다. 분명 피로와 졸음 때문에 겨우 걷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전환 된것 만으로도 다시 살아난다. 인간은 주위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존재다. 누군가가 함께하고 있다는것 만으로도 동기부여가 되고 환경이 변하는것(밤에서 아침으로 등)만으로도 얼마든지 각성이 된다. 우리의 몸은 신비하다. 버티고 버티다 보면 회복되는 구간에 들어선다.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그 어떤 순간 보다 더한 스스로에게 경외감, 황홀함을 느낀다. 이것이 장거리 달리기에서만 경험할수 있는 자유의 순간이다.




각성의 순간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이미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에 들어선것이다. 이미 24시간이 지나갔다. 이토록 오랫동안 깨어있은적은 처음이다. 거기다 벌써 1,000m급 산을 7개를 넘어왔다. 남은 산은 두개지만 그전에 업다운이 좀 있다. 그리고 아직 거리가 40km 가까이 남았다. 피로가 피로에 겹겹이 쌓여 온몸을 짖누른다.  해는 중천에 떴지만 두번째 졸음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어떤짓을 해도 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때부터 아무런 기억이 없다. 고통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버티면서 걷는다. 앞뒤로 아무도 없다. 이 길이 맞느지도 모르겠다. 그냥 이대로 모든게 끝이 났으면 좋겠다. 나약하다. 이것이 진정한 나의 실체였다. 나약해 빠진 한명의 인간이다.


얼마나 갔는지 얼마나 남은지 모르겠다. 터덜터덜 걷어간다. 순간 선수들이 확연히 늘어났다. 5peaks 참가자들과 코스가 겹치는 구간에 들어섰다. 9peaks 선수들은 목요일 아침에 출발했고 5peaks 선수들은 하루 늦게 금요일 새벽에 출발을 했다. 겹치는 구간은 끝나는 20km정도다. 이제 끝이 보인다는 것이다. 어디거 그런 에너지가 나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제 막 출발한 것 처럼 달려갔다.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


2022 UTNP 공식사진- 마지막산 신불산 오르는 길

많아진 선수들을 뚫고 내달렸다. 출발 후 첫번째로 오른 간월재에 도착. 이제 피니시 라인 까지는 긴긴 내리막뿐. 길고긴 내리막을 달려 내려간다. 이미 피로와 고통은 잊혀졌다. 끝인가, 이대로. 정말 내가 끝낼수있는가.

아 쉽 다

어찌된 영분인지. 왜그런 감정이 떠올랐는지 알수 없다. 내생에 가장 긴 장거리 레이스 였다. 발가락 통증으로 타이레롤을 벌써 4개나 먹었다. 잠을 못잔지 벌써 24시간 넘어서 30시간이 넘었다. 2022년의 마지막

목표 중 하나였다.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를 장기 플로젝트[Road to Chamoix]의 시작인 대회였다. 어쩌면 살아남은 것에 대한 안도감 일수도, 드디어 잘수있다는 기쁨일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피니시 라인까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나를 위한 환호는 없다. 나를 위한 시상대로 없다. 여전히 나는 이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지 않고 마지막 선을 내 발로 지났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의

DNA에는 20만년동안 쌓아왔다. 수렵채집 시절부터 사냥을 하던 사냥꾼의 DNA. 살기위해 사냥을 했겠지만 필히 그것뿐만은 아니었을거다. 집단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했을것이고 사냥꾼에게 사냥의 부산물은 자신의 가치이다. 거기에서 오는 꽤감으로 분명 일종의 놀이로 진화했을 것이다. 나는 20만녕동안 쌓아온 본능을 잊지 않고 있을 뿐이다.

가장 뛰어난 사냥꾼은 되지 못했지만 나만의 사냥에 성공했다. 이렇게 나의 DNA는 진화를 해나갈것이고 이어나가게 됐다.



한번도 이겨본적은 없다.
하지만 아직까지 지지 않았다.




최종 기록

거리: 121.5km

상승고도: 9,190m

시간: 32:32:09


#UT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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