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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달과별 Jul 01. 2018

어떤 이의 포옹, 누구에게는 한 줄기 빛이 되지 않을까

<오, 루시!>, 상처 받기 싫어서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관계 옳은걸까


지하철 역에서 시작해 지하철 역에서 끝나는 이 영화, ‘오 루시!(감독 히라야나기 아츠코)’. 영화 속 내내 등장하는 ‘당신은 포옹이 필요하군요’라는 대사는 아마 영화를 보고 있는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영화 <오 루시!>를 단순한 코메디라고 생각하고 보러간다면 큰 문제가 생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웃기긴 웃기는데 왜 씁쓸한 웃음이 나오는지”, 혹은 “왜 전개가 이렇게 흘러가지” 따위의 생각들이 떠오를 테니까. 이 영화는 코메디가 아닌, 그 반대라면 반대인 영화다. 


'혼밥'을 먹어도 더 이상 이상하지 않은 사회, 결혼이 선택이 되어버리고 개인주의가 만연해진 현대 사회의 모습은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지금은 네 가구 중 한 가구가 ‘나홀로’ 사는 가구라고 한다. 영화 <오 루시!>는 스스로를 사회에서 격리시킨 '세츠코(테라지마 시노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야기를 전개한다.

 

중년의 여성 세츠코는 오늘도 변함없이 출근을 하기 위해 지하철 플랫폼에 서는 모습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그 순간 뒤편에 있던 남자가 그녀의 귀에 이별 인사를 남긴 채 달려오는 지하철로 뛰어든다. 매우 강렬한 영화의 도입부였다. 우왕자왕하는 사람들 속, 세츠코는 놀라는 것도 잠시 별 요동 없이 담배를 피운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도, 신경 써 주는 사람도 없는 세츠코에게 나이 지긋한 한 동료 여직원은 항상 먹을 것을 챙겨준다. 하지만 세츠코는 매일 그녀가 준 것을 책상 속에 던져 넣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보다 몇 살 위인 나이 든 여직원이 퇴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이 더욱 착찹해진다.



누구에게나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공간이다. 누가 자신의 삶을 도와주지도, 위로해주지도, 동정해주지도 않는 곳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런 곳에서 ‘사랑’은 내 편을 만나는 것이자, 서로에게 의지하고 더욱 인간다운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세츠코처럼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없이 담배와 수면제만 남아있다면 삶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누구나 외로움은 타지만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면, 그 옆에는 무엇이 남을까.


이 영화는 틀림없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면서 동시에 상처의 치유, 관계의 치유에 관한 내용도 담고 있다. 세츠코의 언니의 딸인 조카 미카(쿠츠나 시오리)의 권유로 다니게 된 영어 학원은 학원이라기엔 약간 야시시한 분위기였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자신에게 가발을 씌우고 ‘루시’라는 이름을 지어준 강사 '존(조쉬 하트넷)'에게 세츠코는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그리고 며칠 후, 세츠코는 설레는 마음으로 학원에 가지만 존이 미국으로 돌아가려고 일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실망해서 학원을 나오던 그녀가 목격한 건 조카 미카와 사랑에 빠져 함께 차를 타고 떠나는 존의 모습이었다.


조카 미카는 연락도 안 되고, 존이 보고 싶기도 했던 세츠코는 미카를 찾는 자신의 언니와 함께 미국으로 떠난다. 되지도 않는 영어 실력으로 미국을 찾아간 루시는 백수가 된 존을 만나고, 월세를 밀린 존을 위해 지갑을 연다. 루시는 존에게 한 구석으로 원했던 것이 맹목적인 사랑이었을 것이다. 


세츠코처럼 스스로를 사회에서 소외시키는 <선택적 나홀로 족>은 '치열한 경쟁 관계로 점철된 사회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고립시키는 선택'이자, 자기 방어의 수단이라고 언급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의 이유는 현대인은 '관계'로부터 상처를 받아 차라리 '고독이 몸부림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보면서 찔리기도 하고 공감되기도 했다. 나의 모습이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상처 받기 싫어서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관계, 이런 나의 방식이 옳은 걸까? 


루시와 같은 영어 학원 수강생 타케시(야코쇼 코지)의 학원에서의 이름은 톰이다. 톰은 이런 말을 한다. “저와 톰은 완전 정반대의 사람이에요”. 세츠코가 루시가 되고서 느낀 설렘, 타케시가 톰이 되고서 느낀 쾌활함은 관객으로 하여금 깊게 사유할 거리를 준다. 설레고 쾌활해질수록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발버둥은 더 강해질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시의 사랑에서 보듯이, 루시의 사랑은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버림받은 혼자만의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통해 세상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세상은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영화의 저면에는 우울함이 깔려 있고, 영화를 보는 내내 그 감정에 압도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보고 나면 이상하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포옹이 어떤 이에게는 세상에 한 줄기 빛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오 루시!>를 통해 위로와 희망의 감정을 느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http://www.lunarglobalstar.com/news/articleView.html?idxno=2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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