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이 사라진 후 만난 도플갱어와의 사랑, 그리고 결말
영화 ‘아사코 I&II’
* 주의!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올해 10월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했던 작품은 '아사코 I&II'였다. 비록 지난 영화제에서는 이 영화를 여러 사정으로 인해 볼 수 없었지만, 이 영화의 주연 배우인 '카라타 에리카'와 '히가시데 마사히로'의 인터뷰가 갑자기 잡힌 날, 서울에서 부산까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해 준 폭풍을 뚫고 새벽부터 해운대로 인터뷰를 하러 갔을 정도였다. 오로지 '카라타 에리카'에 대한 기대와 작은 팬심을 갖고 갔는데, 인터뷰를 한 이후 영화에 대한 궁금증이 끊임없이 샘솟았다. 과연 이들이 말하는 영화 '아사코 I&II'는 무슨 영화일까?
오로지 영화 자체만 놓고 봤을 때, '아사코 I&II'는 필자에게 꽤나 신선하면서 쉽지 않은 영화였다. 그냥 짧게 말하면 "'솔로(결혼하거나 커플이 아닌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가 아닌 사람들'만을 제외하고 모두에게 필요하면서 공감할 만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다"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참 다양한 모습이 하나의 영화에서 드러나고, 또 그러한 것을 보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체감할 수 있는데, 연기 경험이 많지 않은 여자 배우인 카라타 에리카에게 이번 작품은 꽤 좋았던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주연 배우의 연기의 경험은 부족했을지라도 영화를 만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카라타를 선택한 이유는 분명해보인다. 그녀의 미소는 아름답고 사랑스럽지만, 무표정에서는 감정을 읽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사코 I&II'가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담고 있는 감정은 희망, 절망, 그리고 사랑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은 본질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요소가 아니며, '희망'과 '절망'이라는 감정이 멜로영화의 형상을 띄고 그 속에서 나타난다. 영화의 내용은 감정적일 수 있는 내용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는데,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그 속의 캐릭터 그 자체, 혹은 그 캐릭터의 감정에 몰입되지 않는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희대의 썅년'이라며 잠시 분노하고, 저렇게 하는 게 맞는거지 공감과 비판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객관적으로 주인공들을 바라보게 된다. 이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단순히 둘만의 이야기에 한정지을 수 없는 보편적인 이야기임과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형상 그 자체와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다.
아사코(카라타 에리카)와 바쿠/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의 이야기에서 전개는 아사코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아사코와 바쿠. 그렇게 첫 만남에서 키스를 한 둘은 금새 사랑에 빠진다. 믿기 힘들게 사랑에 빠진 둘은 그렇게 사랑을 한다. 그런데 바쿠는 때때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그 이유는 터무니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사라졌다 돌아올 때 바쿠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올 것'이라 말한다. 그런 바쿠는 결국 어느 날 사라지고 돌아오지 않는다.
몇 년 후 바쿠와 똑같이 생긴 료헤이가 등장하는데, 주류 회사의 사원인 료헤이와 카페 알바생인 아사코는 도쿄에서 만나게 되고 어느새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다. 처음에는 료헤이가 바쿠와 똑같이 생겼기에 사랑하게 된 것도 있었지만, 아사코는 곧 료헤이를 '바쿠랑 똑같이 생겨서'가 아니라 자신만을 바라보고 사랑해주는 '료헤이 그 자체'로 인해 사랑하게 된다. 똑같이 생긴 사람의 등장부터 시작해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까지 매우 판타지적인 면인데, 이는 '아사코 I&II'에서의 전개가 판타지적이고 일반적인 상식으로 맞지 않는 부분들이 여럿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문제라고 볼 수 있음과 동시에 아사코와 바쿠, 료헤이 간에 벌어지는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인위적으로 설정할 수 밖에 없었던 최선의 방식이었나에 대해서 의문이 든다.
바쿠는 책임감이 강하지 않은 자유분방한 성격에 충동적이고 거칠었다면, 이에 반해 료헤이는 헌신적이고 현실적이면서 책임감이 강하다. 아사코와 료헤이의 사랑은 5년이 넘게 한결같이 계속되지만, 이들의 사랑은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 겉으로는 너무나도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커플이지만, 결국 아사코로 인해 둘의 사랑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는다. 유명 모델이자 스타가 된 바쿠가 갑자기 어느 날, 료헤이와 아사코가 함께 있는 자리에 나타나고 아사코는 망설임 없이 바쿠를 따라나간다. 이 부분에서 필자를 포함한 관객들은 '천하의 썅년이 있나'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첫사랑을 잊지 못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행복한 꿈을 꾸면서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바쿠를 따라나간 것은 아니었을까. 혹은 바쿠에게서 희망을 봤던 것일까?
그러나 바쿠와 함께 무작정 차를 타고 가던 아사코는 센다이 초입의 바닷가에서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다. 후쿠시마 폭발 사고의 여파와 쓰나미로 파괴된 이 공간을 보며 아사코는 '과거의 환상'에서 벗어나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절망과 희망이 뒤섞여있는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아사코는 이성적인 선택을 하지 못했지만, 과연 그 상황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말도 안 되는, 그리고 해서는 안 될 실수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사코가 성장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건넜어야 하는 다리였을지도 모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할 수 밖에 없고, 그렇기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하면서 발전해나가려는 존재이기에 우리가 사람인 게 아닐까. 결국 아사코가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기에 도망치지 않고 료헤이에게 다시 돌아가고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사코와 료헤이가 연인이 되던 날, 스카이트리가 보이는 도쿄의 모습이 비춰진다.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고 지하철은 다 멈춘 이 날은 후쿠시마 지진과 원자력 발전소 폭발이 일어난 날이었다. 일본 사람들이라면 영화를 보며 자연스럽게 이러한 부분을 눈치 챘겠지만,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눈치채기 쉽지 않았을 부분이다. 그래서 이후 그들은 센다이로 꾸준히 봉사를 갔던 것일테다. 하지만 일본의 아픈 부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료헤이와 달리 바쿠는 이를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표면적으로는 허상에 갇혀 살며 매 순간을 꿈 속에서 사는 것은 바쿠인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꿈을 꾸며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아사코다. 바쿠는 아사코의 꿈에 등장하는 아사코 외의 주인공에 불과했던 것이다. 누구나 '절망'과 '불안'이라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절망은 이겨낼 수 있는 대상이 될 수도, 질 수도 있는 대상이 된다.
료헤이와 아사코가 함께 키우던 고양이를 매개로 하여 아사코는 료헤이에게 돌아갔고, 예전의 모습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는 없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 아사코와 료헤이가 함께 바라보는 '더럽지만 아름다운 강'은 언젠가 이들이 이겨내야 할 시련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구에게나 닥치는 시련이고, 사랑이라는 모습을 통해 표현된 이 과정은 삶에서 지나가야 하는 필수불가결한 과정인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든, 죽음이든, 혹은 무엇이든 간에. 이러한 작품을 개봉 전 미리 만나볼 수 있다니 행운일 따름이다. 한 번으로는 부족한 영화, 꽤 만족스러웠던 작품, 올해든 내년이든 사람들에게 시간이 흘러도 계속 기대되지 않을 수 없는 작품, 오래 사랑받을 수 있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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