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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진 Jun 22. 2021

내가 기생이냐?

미숙과 성숙 사이

지인이 인터넷에 인터뷰 동영상을 올렸다. 예전에 절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는 동영상이었다.     

하루는 스님을 모시고 동네 노래방에 갔다. 노래를 좋아하는 스님은 마이크를 잡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셨다. 그런데 문제는 음정과 박자가 엉망인 것. 서너 곡을 계속 부른 뒤에 지인이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지인이 노래를 마치자 스님이 다시 마이크를 받아서 박자와 음정이 사라진 노래를 계속 부르셨다. 연세 높으신 스님이 즐거워하시는데 어쩌겠는가. 그날 노래방 나들이는 그렇게 마치고 돌아왔다.

며칠 후 스님과 차를 마시다가 노래방 갔던 이야기가 나왔다. 지인은 스님께 왜 박자 음정을 신경 쓰지 않으시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스님이 “내가 기생이냐?”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내가 즐거워 노래하는데 왜 남을 신경 쓰느냐는 설명을 붙이셨다. 지인은 스님의 주관과 배짱과 배포가 참 부러웠다고 한다.     


그런데 지인과 대화를 나누던 분의 생각은 좀 달랐다. 듣기 좋게 부르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며 기생처럼 부르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자기 주관대로 사는 것도 좋으나 세상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도 필요한 것이다. 주관적이고 나 중심적인 것에 남을 무시하는 것이 곁들여진 것이 오만이며, 오만한 사람은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된다. 성숙하고 존경할만하게 된다는 것은 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 되어간다는 의미이며, 자기 중심인 상태를 벗어나서 세상과 상대방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타인에게 폐가 되지 않게 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잠시 혼란스러웠다. 진리를 찾아 수양한 사람이 자신의 주관대로 세상을 넘어서 사는 삶, 속세의 생각과 기준에 맞추어 자신의 주관을 버리고 사는 삶, 두개가 내 앞에서 키재기를 했다.     


어릴 적 나는 나만 알고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고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았다. 미숙이다. 나이 들면서 조금씩 남의 생각도 알게 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교육은 주관적이고 비합리적인 내가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변하도록 도와준 방법이었다. 주위에서 나를 보고 철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철이 든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돌의 모서리와 귀퉁이가 다듬어지고 덜 사나워지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세상에는 나의 주관, 나의 욕구를 누르고 따라야 하는, 따를 수밖에 없는 기준과 객관과 합리가 있다는 것을, 가끔은 억울하고 손해라도 내 주장과 주관을 꺾어야 하는, 그런 부당하고 억울한 것도 감내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 같다. 적당히 비굴해지고 적당히 비겁해졌을 때, 철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철이 덜 든 것 같다.)     


철드는 변화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자기중심적이고 주관적, 비합리적인 내가 스위치를 켠 듯 한순간에 타인 중심적, 객관적, 합리적으로 된 것은 아니었다. 어정쩡한 중간 단계가 있었다. 완전한 내 생각이 아닌, 어디서 듣고 배웠는데 잘 모르는, 그러나 옳은 것 같은, 그런데도 내 것인 양 설명하고 논쟁했던 때가 있었다. 책 두어 권 읽고서 맞아! 하는 순간 온통 나의 철학이요 신념이요 신앙이 되었던 경험 말이다. 나의 허술한 부분이 채워져서 좀 더 나아지고 완벽에 가까워진 듯한 기쁨과 들뜸. 그런 시간과 경험이 쌓이고 걸러지고 다듬어져 온 것 같다.   

  

그런데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되면 주관적이고 비합리적인 나는 없어지는 것일까. 나의 기준과 주관의 자리를 타인의 기준과 객관이 차지해서 결국 나는 남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내 주관과 기준이 객관과 공통의 기준을 흡수해서 더 큰 주관과 기준으로 자라나는 것, 그것이 배움과 성장과 성숙의 의미이며 인격과 인품으로 드러날 것이다.     

 

어쩌면 사람은 영원히 미숙과 성숙의 중간 단계에 사는 존재일 수도 있겠다. 잠시 남의 것을 집어서 과연 이게 나의 것인지 시험하는 것이 삶이고. 그렇다면 지금의 내 신념과 믿음, 진리, 가치는 주관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욕구나 욕망을 그럴듯한 남의 기준과 논리와 표현으로 포장해 놓은 것은 아닐까.

 

머리 따로 가슴 따로. 머리로는 이해되나 가슴으로는 끌어안아지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더운 길 위 띠 두르고 확성기 소리 높여 외쳐지는 정의라는 단어가 자꾸 마음을 비껴가는 것이 안타까운 하루다.   

  

                                                                                                                                                   <2021.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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