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아쉬웠던 녹나무의 파수꾼 소설 리뷰

맛있는 소재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캐릭터와 사건들

by 염코의 서재

들어가며

image.png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보러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가 애니메이션 한편의 예고편을 보았습니다. 녹나무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다소 클리셰적이지만 흥미를 자극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예고편이 잘못 뽑혔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은 천천히 써보겠습니다.)


거기에 일본 애니 특유의 웅장한 OST와 무려 작가가 히가시노 게이고였어요. 작가의 미스터리 추리 소설들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판타지 요소를 섞은 휴머니즘을 다룬 전작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너무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났습니다.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16586056


신비로운 일들일 벌어지는 잡화점에서 벌어지는 도둑들의 이야기, 신비로운 녹나무에서 벌어지는 범죄 소년의 이야기. 두 작품의 깔이 너무 비슷한 거 같아서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벌써 제 머릿속에서는 사연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녹나무로 찾아오고, 나무의 영험한 힘을 통해서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따뜻한 이야기들이 펼쳐졌거든요.


바로 원작 소설을 구매해서 읽어보았습니다. 그러곤...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래도 애니메이션은 좀 낫겠지 하고 극장을 찾았지만 애니는 애니대로 실망스러웠습니다. 이번 리뷰에서는 먼저 원작 소설을 리뷰해보겠습니다. (애니는 다음 리뷰에서 다룰께요!) 그리고 소설가 지망생답게 나라면 어떻게 개선했을 지 상상의 나래를 한번 펼쳐보겠습니다.



(주의. 여기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의 좋았던 부분

먼저 소재 자체는 훌륭했습니다. 그믐날과 보름날 밤에 녹나무로 사람들이 찾아오고, 각각 마음을 남기는 기념과 친족이 남긴 마음을 받는 수념을 행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단순히 텍스트로 전달할 수 없는 애타는 마음, 드러내고 싶지 않는 자신의 치부마저 전달된다는 점이 굉장히 설득력 있었습니다. 녹나무를 소원을 빌면 뭐든지 이뤄주는 신적인 존재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 이 정도면 수천살 먹은 나무라면 할 수도 있겠네!' 이렇게 다가오더라구요. 그리고 녹나무에 마음을 남기는 행위를 '기념'이라는 단어로 표현해준 점도 너무 좋았습니다.


image.png


이렇게 소설을 보고 영화의 예고편을 다시 보았는데, 예고편 제작자는 원작에 대한 이해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작 내에서도 엄연히 녹나무가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데 최대한 후킹하게 만든 광고로 느껴지더라구요.


다음으로 간결하고 담백한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문체가 좋았습니다. 550 페이지 가까이 되는 분량이었지만 전반부가 지루해서 그렇지, 쉽게 읽혀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챕터도 간결하게 끊어주어서 여러모로 독자 입장에서 읽기 편했어요. 인물들의 대사 위주로 대부분의 묘사가 진행되는데, 그 와중에 굉장히 다양한 어휘를 사용하여 단조롭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습니다. 참 이런 간결한 묘사는 배우고 싶더라구요.


image.png

다음으로 치후네 캐릭터가 좋았습니다. 원피스의 닥터 쿠레하 캐릭터 이후에 이렇게 매력적인 중년의 여성 캐릭터는 오랜만인것 같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한 기업을 이끌어오고, 은퇴할 무렵이 다되어서도 여전한 에너지와 열정을 보여주는 멋진 여성 CEO 캐릭터를 만들어 냈더라구요. 이 작품에서 기억에 남는 인물 한명을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없이 치후네를 선택할 것 같아요.


소설의 아쉬운 부분

1. 지독히도 지루한 전반부

자, 이제 대차게 소설을 까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히가시노 게이고 선생님이 거장에 제가 정말 리스펙하는 성실한 작가의 표본 (연 평균 2.3권을 30년 넘게 유지하심;;)이지만 할말은 해야겠습니다.


먼저 소설 전반부는 정말 지독히도 지루합니다. 전체 분량이 550 페이지인데 녹나무가 그래서 어떤 힘이 있는지, 사람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건지가 300 쪽이 다되어서야 등장합니다. 그전까지는 모든 인물들이 주인공 레이토에게 녹나무 관련 얘기가 나오면 '아차차... 그건 네가 스스로 알아내야해. 그러니 말해줄 수 없어.'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레이토도 짜증이나고 읽고 있던 저도 짜증이 나더라구요. 그리고 막상 알려주고 나니 이게 그렇게까지 꽁꽁 감출만한 일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크게 임팩트가 없는 후반부

후반부도 사실 그다지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치후네의 지갑을 빼돌리고, 이를 이용해서 임원회의에 끼어들어서 레이토가 당당하게 한마디 하는 장면은 주인공의 성장을 보여주기 위한 억지 연출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오바 소키 에피소드는 '에? 이게 끝이야?' 싶을 정도로 허무하게 끝나버렸습니다.


그나마 후지 가문 에피소드가 좋았어요. 녹나무를 통해서 키쿠오의 사연을 알게되고, 요양원에서 작은 음악회를 준비하는 과정이 참 가슴을 먹먹하게 하더라구요. 제게는 요 장면이 하이라이트였습니다. 애니를 보려고 극장을 찾아간 것도 이 장면에서 음악을 어떻게 연출할까가 너무 궁금해서였습니다. (물론 크게 실망했는데... 자세한 얘기는 다음 애니 리뷰에서 다루겠습니다.)


3. 밋밋한 캐릭터

image.png

주인공 레이토의 배경은 정말 불우합니다. 호스티스 어머니와 손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로 아버지는 얼굴도 모르고 어머니는 어렸을 때 죽습니다. 그래도 크게 탈선하지 않고,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기숙사에 살며 열심히 일해요. 그러다 부당한 해고를 당하고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절도를 하다가 체포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배경만 보면 주인공은 거칠고, 버르장머리 없고 제멋대로지만 생존 본능이 탁월한 캐릭터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레이토는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착하고 성실하고, 교양은 다소 부족하지만 귀엽게 봐줄 수 있는 캐릭터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레이토가 성장해나간다는 묘사를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크게 와닿지 않았습니다. 레이토의 유일한 변화라고 한다면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하고 동전을 던지던 유약한 모습에서 임원 회의에 난입해서 열변을 토한 모습 정도였습니다. 가족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불량 소년이 교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보기엔 레이토가 시종일관 너무 착하고 성실했습니다.


치후네를 제외한 인물들도 크게 매력을 느끼기는 어려웠습니다. 특히 오바 소키나 후지 유미와 같은 레이토 또래 캐릭터들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아쉬웠어요. 특히 유미와는 아예 썸을 탈꺼면 타고, 안탈꺼면 안타지 애매한 감정인 상태로 흐지부지가 된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을 의식했는지 애니에서는 대놓고 썸을 타는 장면을 연출해주더라구요. 애니가 그 점 하나는 좋았습니다.


4. 밋밋한 사건들

앞서 말했든 저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마음을 전달한다는 녹나무의 능력 설정이 너무 좋았습니다. 다만 이 좋은 재료를 잘 못살렸다고 느꼈어요. 얼마든지 다양한 응용이 가능할 것 같았는데, 작품에 등장하는 마음 전달 에피소드들이 한정 적이었어요.


1. 후지 키쿠오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서 작곡한 노래 전달 (이 에피소드가 제일 좋았음.)

2. 후지 도시아키가 자신이 녹나무를 통해 들은 노래를 자신의 딸인 후지 유미에게 전달 (창의적인 응용)

3. 오바 토이치로가 자신의 핏줄이 아닌 아들, 오바 소키에게 마음을 남기지만 읽지 못함.

4. 치후네가 레이토에게 마음을 남김


여기서 치후네가 레이토에게 마음을 남기고, 레이토가 이를 눈치채고 마음을 읽는 부분은 너무 아쉬웠습니다. 전체 스토리를 사실상 이 2명이 이끌어가는데 아무런 긴장감없이 불현듯 레이토가 눈치채고 마음을 읽습니다. 솔직히 '이걸 이렇게까지밖에 연출 못한다고?'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전체 스토리가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은 밋밋하고 슴슴한 이야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너였으면 어떻게 쓸래?

사실 비평만 하는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라면 이런 부분들을 어떻게 개선하겠다는 상상을 펼쳐보겠습니다.


1. 레이토의 주인공으로서 매력 강화

레이토는 우선 매력적인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한 배경은 갖추었습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선함을 잃지 않았고, 가족의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가졌습니다. 그렇다면 레이토에게 좀 더 불량함과 불성실함을 부여하고, 이것이 교화되어가는 과정을 그려보면 어땠을까요? 이런 캐릭터로 가장 먼저 떠오른건 슬램덩크의 강백호, 정대만이었습니다.

image.png

녹나무의 파수꾼으로 일을 하지만 레이토는 빡빡 깎은 금발 머리에 타투가 한가득인 겁니다. 치후네와 약속한 기념 일정 관리와 녹나무 주변 청소는 마지못해 수행하지만 찾아오는 관광객이나 손님들한테는 불친절하죠. 불량한 외모와 달리 술과 담배는 일절 하지 않고, 다친 동물들은 정성껏 돌봐주는 츤데레입니다.


그래도 그 특유의 성격으로 녹나무를 위협하는 세력들을 무찌르고, 서서히 나무와 치후네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불량소년으로 그리면 매력이 더 살아났을 것 같습니다. 그랬다면 후반부 야나기사와가 임원 회의에 난입해서 일장 연설을 펼치는 부분도 개연성이 더 살아났을 것 같습니다.


2. 빌런 강화

전체 스토리가 루즈하게 느껴진 데에는 이렇다할 위기가 없는 것도 한 몫합니다. 치후네가 일평생을 바친 호텔이 사라지고 기업에서 쫓겨나는 위기가 펼쳐지지만 치후네는 담담합니다. 더군다나 은퇴할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기업에서 물러나는게 그렇게 어색하지 않습니다. 한참 갈등이 최고조로 나아가도 녹나무와 레이토의 안위에는 큰 위협이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살아도 평화롭게 잘 지낼 것 같거든요. 오히려 치후네가 죽으면 레이토는 저택을 상속받아 돈까지 생깁니다. 그래서 독자가 몰입한 대상인 레이토가 그다지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걸 한번 비틀어서 마사츠키를 비롯한 야나기사와 가문이 녹나무를 베어버리고 그 부지에 호텔을 세우겠다고 대립하면 어땠을까요? 그리고 어엿한 녹나무의 파수꾼으로 성장한 레이토가 그룹의 위협으로부터 치후네와 녹나무를 지켜내는 서사라면 어땠을까요? 그 과정에서 기념을 창의적으로 활용했다면 어땠을까요? 가령 혈육이면 마음을 전달받을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서 마사츠키를 비롯한 야나기사와 가문 사람들을 녹나무로 집결시키고, 한번에 마음을 전달하는 트릭을 사용해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3. 녹나무 설정 정교화 및 초반부 오픈

녹나무의 설정은 너무 좋습니다. 이를 좀 더 살려볼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소설에는 150년 전에 기념을 한 기록이 남아있다고 언급이 되지만, 실제로 세대를 건너뛰어서 마음을 전달받는 에피소드는 없습니다. 시간을 초월해서 과거 가족들이 남긴 기념을 전달받을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래서 레이토가 자기 엄마의 마음, 할아버지의 마음을 전달받고 가족의 사랑을 느끼는 장면을 묘사해보면 어떨까요?


다음으로 녹나무의 힘도 아예 초반부에 오픈하면 어떨까요? 불량한 버전의 레이토가 첫날부터 무슨 영험한 힘이 있겠어? 하고 자기가 직접 향초를 켜고 거기서 죽은 엄마의 마음을 느끼는건 어떨까요? 그래서 적당히 하다가 물건들을 훔쳐서 달아나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이도록 하면 어떨까요. 이렇게 초반부에 주인공이 직접 경험함으로써 녹나무의 힘을 공개하면 신비로운 느낌도 살리고, 녹나무의 힘을 이용한 에피소드들을 더 많이 그릴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마치며

정리하자면 저는 이 작품에서 기승전결이나 갈등구조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MSG와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져서 슴슴하고 담백한 평냉의 맛을 이해하지 못한 걸 수도 있습니다. 저와 다르게 읽으신 분들이 계시면 댓글로 남겨주시구요, 저는 내일 애니 리뷰를 마저 남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