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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정 Oct 25. 2019

부모의 삶을 쓴 지 2년,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

글로 하는 작은 효도

일찍이 철이 들었다. 응석과 투정은 내가 부려서는 안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엄마는 다른 엄마들보다 촌스러워 보였고, 아빠는 다른 아빠들보다 힘들어 보였다. 어수룩한 엄마의 말과 항상 지쳐있는 아빠의 모습 앞에서 나는 떼를 써서는 안 된다 생각했다. 또래보다 키도 작고 외소 했지만, 친구들보다 생각도 크고 깊은 마음을 갖게 되었다. 천진난만함과 철없음은 아이라고 해서 무조건 해당되는 건 아닌가 보다. 나는 키보다 마음이 먼저 자랐다.    

 

나는 키보다 마음이 먼저 자랐다.



항상 궁금했다. 엄마는 왜 맨날 모른다고 할까. 엄마는 왜 글씨를 잘 읽지 못할까. 아빠는 왜 맨날 지쳐 잠만 잘까. 아빠는 왜 온몸을 써서 일할까. 왜 우리 부모는 삶이 매번 버거울까. 그 답이 알고 싶을 때마다 끄적였다. 쓴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 묻는다고 알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걸 더 잘 알았다. 그저 혼자 품고 고민했을 뿐이다.     


쌓이고 쌓여 답답했다. 자주 부모의 생각으로 체했다. 그러고 나면 항상 자책했다. 나에게 부모는 왜 사정일까. 내가 누리고 받은 밥, 용돈, 보살핌과 사랑은 왜 자꾸만 잊히는가. 나에게 부모의 존재는 왜 슬픔일까. 엄마와 아빠를 보면 눈물이 나고, 화가 나고, 서글퍼질까. 나는 도대체 왜 그럴까.     

 

그 생각들은 항상 삶이 급해 짧은 메모와 부족한 문장으로 마무리되지 못하고 남아있었다. 가만히 앉아 부모만을 사유하기에는 당장 해야 할 출근과 해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나는 자식보다 아르바이트생, 회사원, 아나운서가 급했다. 채무자로 빚을 갚아야 했고, 취준생으로 꿈을 이뤄야 했고, 직장인으로 일을 우선시해야 했던 날들이었다. 직장생활 10년 차. 이제 됐다. 잠시 멈춘다 해도, 애쓰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 위안했다. 회사를 그만두었다.


    




급한 일상과 벅찬 하루가 멈추자, 완성하지 못한 글을 살필 수 있었다. 평소 좋아했던 작가의 글쓰기 수업을 찾아들었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공들여 평생 첫차를 타고 공사장으로 향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한 편의 글로 완성했다. 수많은 퇴고로 고치고 수정한 글은 잘 마무리될 수 있었고, 그 글을 읽으며 내 마음도 정리할 수 있었다.      


글로 몸살을 알았다. 이상하게 쓸 때마다 아팠다. 엄마가 왜 평생 자식들 뒷바라지에 그렇게도 최선을 다했는지, 아빠가 왜 평생 공사장에서 땀을 흘리고 힘을 써가며 돈을 벌어야 했는지. 쓰며 이해하자 몸이 아팠다. 그때 엄마의 마음을, 그때 아빠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자 몸살을 앓았다. 나는 쓸 때마다 아팠고, 쓸 때마다 건강해졌다.      


그렇게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가 되어 부모님의 이야기를 써온지 2년이 되어간다. 그 시간 동안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갔다. 평생 건설현장에서 50년 넘게 노동하며 살아온 아빠. 평생 주부로 40년 넘게 남편과 자식을 위해 쌀을 씻은 엄마. 그 위대한 부모의 생애를 나는 너무나 늦게 인정하게 되었다. 이제야 나는 글로 작은 효도를 한다.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가 되어 부모님의 이야기를 써온지 2년이 되어간다.




‘겨우’라는 말에 대해 생각한다. 겨우 무언가를 했다고 하면, 우린 그 양과 결과에 실망하기도 하고 주눅 들기도 한다. 겨우 이거밖에 못하다니. 내가 겨우 이 정도라니. ‘겨우’ 앞에서 우린 자주 침울하고 작아진다. 큰 맘먹고 세운 계획도, 단단히 결심하고 벌인 시작도, 일상과 순간 앞에 무너지고 사라진다. 우리가 소유한 습관은 무섭고, 나태는 거대한 것이어서 우리는 번번이 실패한다.     


부모님에 대한 글을 쓰고 보니, 나는 이제야 겨우 자식이 되어가는 것 같다. ‘자식’이라는 것은 태어남과 동시에 부여받는 자격이지만, 엄마의 희생과 아빠의 헌신을 생각하면 마냥 누릴 수만도 없다. 우린 부모의 마음을 너무나 오랫동안 모르고, 뒤늦게 알아 되갚는다 해도 부족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겨우, 자식이 되어야 한다. 그 ‘겨우’는 빈약하지만, 우리가 애써 되어야만 하는 겨우다.     

 

매번 일어나는 일상의 수많은 그르침 앞에 겨우 라도 쌓을 수 있다면 가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끝내 부모의 마음보다 큰 무언가는 품을 수 없으므로, 거저 주어진 자식이라는 가장 완벽한 특권 앞에 노력해야 한다. 온 맘 다해 겨우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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