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의 저서 『감정의 뇌과학』 표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예순이 넘어서도 여전히 감정의 지배를 강하게 받는 나에게 이 질문은 거부할 수 없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공자는 예순을 ‘이순(耳順)’이라 하여 귀가 순해지는 나이라 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고, 천명을 따라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나이. 하지만 나는 군자가 되기엔 애초에 틀린 모양이다. 요즘 나는 고작 다섯 살 손녀의 말 한마디에도 감정의 버튼이 수시로 오작동한다.
며칠 전, 퇴근 후 육아에 고군분투하는 사위가 안타까워 손녀들을 돌봐주러 큰딸 집에 들렀다. 사실 전날 손녀가 뜬금없이 “할머니, 내일은 오지 마”라고 했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다음 날, 사달이 났다. 매일 아이들 목욕시키느라 고생하는 딸 부부를 돕고자 큰손녀를 사우나에 데려가겠다고 제안한 순간이었다. 딸과 사위는 반기며 목욕 바구니까지 준비해 두었는데, 정작 주인공인 손녀가 충격적인 한마디를 뱉었다.
“할머니, 오늘 오지 말라고 했잖아!”
40개월 된 아이의 단호한 거절이 내 마음속에 서운함이라는 파도를 일으켰다. 예사로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손녀는 할머니가 온 것이 마치 자기 영역을 침범하거나 약속을 어긴 것처럼 반응했다.
퇴근 후 쉬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매일 한 시간씩 사위의 짐을 나누려 노력해 왔건만, 돌아온 건 딱 잘라 오지 말라는 거절이었다. 서운함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결국 혼자 사우나에 앉아 뜨거운 열탕에 몸을 녹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상황을 반대로 뒤집어 보았다. 만약 손녀가 나를 너무 좋아해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면? 아마 나는 이토록 평온한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일전에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 미끄러질까 봐 노심초사하느라 단 1초도 쉬지 못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믈로디노프는 책에서 이런 복잡한 마음을 ‘핵심 정서(Core Affect)’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핵심 정서는 우리 몸의 생존력을 나타내는 온도계와 같아서, 신체 내부의 상태를 반영해 유쾌함이나 불쾌감의 정도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돌아보니 당시 내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4월답지 않은 꽃샘추위가 기승인데 학교 교장실 난방기는 고장이 나 냉골이었다. 두 딸을 낳은 뒤 얻은 지독한 산후풍은 한기가 들면 뼈마디를 쑤시게 만든다. 몸이 춥고 아프니 내 감정 온도계는 이미 ‘불쾌’를 가리키고 있었고, 손녀의 거절은 그저 서운함이라는 도화선에 불을 붙인 셈이었다.
저자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능력을 지녔다고 말한다. 감정이 발생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며, 자신의 고유한 감정 유형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이다.
이제 이순의 나이를 지났으니 나의 핵심 정서를 자각하고 관리해야 할 의무가 생겼다. 학교에선 매 순간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는 교장이지만, 직책을 벗고 할머니로 돌아온 순간까지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사우나의 온기는 날카로웠던 마음을 순한 양으로 만들어주었다. 손녀에게 느꼈던 서운함은 뜨거운 물속에서 눈 녹듯 사라졌고, 덕분에 밤에는 모처럼 숙면을 취했다.
오늘 아침, 내 몸의 온도는 적당하고 나의 핵심 정서는 매우 유쾌하다. 손녀가 할머니를 찾지 않는다면 오히려 대환영이다. 퇴근 후 푹 쉬고 운동하며 나만의 시간을 즐기면 그만인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다섯 살 손녀의 “오지 마”는 나에게 상처를 주려던 독설이 아니었다. 할머니에게 혼자만의 휴식을 선물하려던 ‘우주의 배려’였음을, 이제야 뇌과학의 힘을 빌려 이해해 본다.
* 작품 '손녀가 세명인 할머니입니다'에서 한 편을 재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