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능력이 없는 할머니입니다.

by 해림

“빨간색 커다란 풍선이 없어!”

목욕을 시작하려던 손녀가 바람 빠져 쪼그라든 풍선을 보더니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 온 손녀가 목욕할 때면 꼭 챙기는 ‘삼총사’가 있다. 아기 상어 머리, 주홍색 공, 그리고 빨간 풍선이다. 아이의 즐거움을 위해 내가 하나둘 챙겨주던 소품들이 이제는 아이에게 확고한 목욕 루틴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커다란 풍선을 물에 띄울 생각에 잔뜩 부풀어 있던 아이는 실망감에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풍선을 대신할 장난감을 이것저것 ‘대령’했고, 사위는 심폐소생술이라도 하듯 쪼그라든 풍선을 불어보려 애썼다. 보다 못한 나는 남편에게 당장 나가서 새 풍선을 사 오라고 재촉까지 했다.


그때, 임신으로 배가 불룩한 큰딸이 나타났다. 딸은 목욕탕으로 들어서며 우왕좌왕하는 우리에게 나가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거실에서 머쓱하게 대기하고 있자니 목욕탕에서는 여전히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이내 비명 섞인 울음은 맑은 웃음소리로 바뀌어 들려왔다.


딸은 아이에게 “풍선이 작아져서 정말 속상했구나. 풍선은 시간이 지나면 바람이 빠져서 작아진단다”라며 차분히 아이를 설득했다. 결국 아이는 풍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즐겁게 목욕을 마쳤다. 상황이 종료된 뒤, 큰딸이 우리에게 핀잔 섞인 한마디를 던졌다.

“아이가 실망했을 때는 그 마음을 먼저 알아주고 위로해야지, 다들 엉뚱한 물건만 들고 오면 어떡해요. 아이의 마음에 ‘공감’부터 해야 한다고요.”


나 역시 아이의 마음을 헤아렸기에 뭐라도 챙겨주려 했던 것인데, 딸의 눈에는 나의 노력이 공감이 아닌 단순한 ‘달래기’로 보였던 걸까. 공감과 위로의 차이는 대체 무엇일까. 나는 아이가 목욕하는 내내 기어이 쪼그라든 풍선의 매듭을 풀어 다시 바람을 불어넣어 주기까지 했건만.


딸 식구가 돌아간 뒤 남편에게 섭섭함을 토로했다. 우리의 정성이 공감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도 서러운데, 평소 그리 살가운 편도 아니던 큰딸이 제 자식에 대해 ‘공감’을 운운하니 기가 찼다. '우리의 노력은 공감으로 보이지 않나 보네'라는 내 푸념을 듣던 남편이 툭 던졌다.


공감은 아래로만 흐르는 건가 보지. 위로는 잘 안 흐르고.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남편의 말이 그 어떤 책 속 구절보다 날카로운 명언으로 다가왔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 친정어머니를 공감하는 일이 늘 힘들었다. 말수가 적고 감정 표현이 서툰 어머니 밑에서 나는 평생 어머니의 공감을 갈구하며 살았다.


하지만 어쩌면 오늘의 나처럼, 어머니가 서툰 방식으로 보내왔던 무수한 공감의 신호들을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외면해 왔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 자식들은 부모에게 공감을 갈구만 할 뿐, 부모가 주는 사랑의 방식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은 채 평생 아기처럼 응석만 부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자신도 어느덧 공감받지 못하는 부모가 되어버리는, 일종의 서글픈 ‘내리사랑의 본전치기’를 하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었다.


딸에게 들은 핀잔과 친정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으로 씁쓸해하던 내 마음을, 오늘 밤은 남편의 그 투박한 한마디가 정확히 짚어 위로해 주었다.


어쩌면 공감이란 수직으로 흐르는 강물이 아니라, 옆에서 나란히 서서 서로의 눈높이를 맞춰주는 따뜻한 눈 맞춤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작품 '손녀가 세명인 할머니입니다'에 올렸던 글을 재작성하여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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