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교장 취임 첫날이다. 오전 내내 취임식과 시업식, 입학식을 폭풍처럼 치르고 교장실 소파에 앉아 비로소 긴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교장실 문을 경쾌하게 두드렸다.
"교장 선생님, 잠깐 저희 자율 동아리 홍보 좀 해도 되겠습니까?"
교장실 문을 이토록 쉽사리 열고 들어오는 학생의 기세에 살짝 놀랐다. 자신을 학교 환경 동아리 회장이라 소개한 아이는, 살살 웃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할 말을 다 했다.
우리 학교에도 '그레타 툰베리' 같은 당찬 환경 운동가가 있었다니! 대견한 마음에 나는 학교장으로서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아이는 곧 교장실 앞 텃밭 가꾸기도 시작할 예정이니 조금 시끄러워도 양해해달라며 너스레를 떨더니, 직접 만든 친환경 수세미와 비누망을 선물로 건넸다.
'칭찬은 교장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가족들이 보내온 취임 축하 떡을 아이 손에 듬뿍 쥐여주었다. 아이는 떡을 챙기며 한마디 덧붙였다.
"오늘 취임사에서 하신 행복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좋았어요. 목소리도 시원시원하시고요!"
기특한 녀석. 취임사에 대한 피드백까지 해주다니, 오히려 내가 학생에게 격려를 받은 셈이다. 아이가 나간 뒤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린 학생도 저렇게 지구를 위해 발로 뛰는데, 정작 교장인 나는 무엇을 실천하고 있는가. 탄소 중립이니 기후 위기니 말로만 걱정했지, 내 손녀들의 미래를 지켜줄 실질적인 행동은 턱없이 부족했다는 반성이 밀려왔다.
사실 지난 주말, 나는 대대적으로 옷장을 정리했다. 언젠가 입겠지 하며 쌓아두었던 옷과 신발을 헌 옷 수거함에 한 보따리 내놓았다.
우리 친정어머니의 가치관에서라면 수십년은 족히 더 입고 신을 것들이었다. 환경을 생각하면 새 옷을 사지 않는 것이 최고의 실천이거늘, 나는 이번 취임을 앞두고 '취임복'을 무려 두 벌이나 샀다.
"퇴직이 2년밖에 안 남았으니 이제 절대 옷 안 사고 버틸 거야!"
나의 장엄했던 각오는 "교장인데 옷 한 벌은 번듯해야지"라는 남편의 한마디에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그럴까?" 하며 들뜬 마음으로 카드를 긁고 만 것이다. 교장이 꼭 반질반질한 새 옷을 입어야 하는 법은 없는데, 결국 몇 년 뒤 처분해야 할 짐을 또 늘리고 말았다.
반성하자면 끝도 없다. 그동안 나는 인터넷의 '폭탄 세일' 품목이나 백화점 매대 위에 누워있는 저렴한 옷들만 골라 사 왔다. 싸다는 이유로 산 옷들은 정작 마음에 쏙 드는 법이 없었고, 옷을 고르는 안목조차 키워주지 못했다.
덕분에 교장이 되어서도 남 앞에 입고 나갈 만한 변변한 옷이 없다는 사실이 문득 서글펐다.
오늘 저녁, 나는 남편에게 대단한 선언을 했다. "이제는 싼 거 여러 벌 말고, 1년에 딱 한 벌씩만 제대로 된 명품 옷을 사 입을게!"
남편은 기가 차다는 듯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환경을 지키겠다는 거창한 결심이 왜 '명품 옷 한 벌'이라는 엉뚱한 결론으로 튀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버려지는 옷을 줄이는 것이 환경 보호의 시작이라면, 유행 타지 않는 좋은 옷 한 벌을 오래 입는 것도 나름의 논리 있는 실천이 아닐까?
취임 첫날, 환경 동아리 학생 덕분에 나의 소비 철학은 이렇게 또 한 번 혼란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