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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jung Park Apr 28. 2020

다시, 싱글

밥 위에 새우 반 토막이 얌전히 올려진다. 새우도 안 좋아하는데. 무심하게 올려진 새우 반 토막이 내심 좋다.

‘평생 내 것이 있겠구나.’

많은 걱정과 각오로 시작했지만, 이 시작은 생각보다 핑크빛이다.

“혜진아, 내 아들이 아무리 미워도 아인이는 놓고 가라. 내 아들한테도 절대 안 줄 거야. 허리가 부서져도 내가 키울 거다. ”

“......”

“너 이 나이에 혹 달고 가면 다시 결혼도 못 하고 평생 고생하고 산다. 그냥 다 털고 가.”

가혹하지만 다 맞는 얘기다. 서른여섯이 산뜻하지 않은 나이인 것도 맞고, 12개월 애 엄마로 살기가 쉽지 않을 거란 말도 맞다. 너무 맞는 말이라 더 숨이 막혔다. 남자에게 기대 살 일이 생기지 않는 한, 평생 이 아이를 먹여 살리는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건 욱해서 될 일이 아닌 진짜 문밖 현실이었다. 갓난아기랑 울고 앉아 있다고 해결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충분히 마음 상했을 친정에 쪼르르 기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요즘 이혼이 별거냐 하지만 이혼을 앞둔 이들에게 이혼은 분명, ‘별 거’이다.

뭐라도 해서 그 동굴을 빠져나오도록 단련된 나에게도 처음부터 이혼이 그리 쿨한 결정은 아니었다. 불구덩이 속을 반년은 헤맸던 것 같다. 데일 것을 알면서도 뛰어들고, 또 뛰어들고, 더는 못하겠다는 마음이 들 때까지 어쩌면 내 스스로를 기다렸던 것도 같다.

남편이 있을 때도 난 가장이었다. 지금 와서 보면 예행연습이 됐다고 감사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화려한 운동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직장인이 된 그는 평범한 일원이 된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 이런 사람이야.’ 병에 걸린 것 같았다. 결국 극도의 분노 조절 장애로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그의 난폭함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으로 점점 커져갔다. 누군가는 그랬다. 내가 놀아야 그가 책임감을 갖고 사회생활을 버텨볼지 모른다고. 하지만 일생 일을 쉬어본 적 없는 워커홀릭이 그를 일하게 하려고 애나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건 그가 스스로 이겨내야 할 일이었다.

나는 조리원에서 나오자마자 힐을 신고, 마치 생일 파티 하나쯤 치른 사람처럼 일상에 복귀했다. 뭐 가장이 별건가.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거지. 할만했다. 모유가 차고 넘쳐 옷을 적시고, 집에 오자마자 하루 한 끼를 챙기기 전 아이에게 우유부터 먹어야 하는 일상이 좀 지치긴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예고 없이 찾아오는 그의 난폭성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했고, 결국 우리의 결혼은 1여 년 만에 끝이 났다. 14년 나를 짝사랑했던 이와의 결혼. 1년의 불꽃 같았던 부부생활. 되돌아온 나에게는 딱 하나, 나의 아이가 생겨있었다.

원래 헤어지자는 말을 밥 먹듯 하는 사람들은 헤어지지 못한다고 한다. 반면 딱 한 번 이혼을 내뱉은 나에게 후회란 없었다. 갓난아기를 데리고 나오면 어떻게 일을 할 것이며, 어떻게 살 아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도 그보단 나을 것 같았다.

12월 3일. 이삿짐 차를 뒤따르며 아빠는 운전에 온 생각을 집중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감기로 고생하는 모녀가 안쓰러웠는지 차 안은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데워져 있었다. 코를 핑핑거리며 자는 아인이를 가만히 안고 창밖 낯선 풍경을 보고 있자니 숨구멍 깊이 민트향이 느껴졌다. 눈물은 어디로 간 걸까. 그 지독했던 시간이 벌써 추억이라도 돼버린 걸까. 화려했던 내 인생, 그 인간 때문에 지금 내 꼴이 이게 뭔가 그런 억울함이라도 있어야 마땅하건만 웬일인지 그냥 참 좋았다.

누가 그랬다. 이혼의 후유증은 연애의 열 배는 된다고. 글쎄. 12개월 아인이는 운이 좋은 아이인지 좋은 어린이집과 따뜻한 돌봄 이모를 만났고, 난 1년 완모를 마치고 우유 흐를 걱정 없이 일에 복귀했다. 시어머니에게 애를 맡길 때는 자기 아들 대신 일하러 다닌다고 생색은커녕 저녁 한 끼 회식도 눈치가 보이더니 세상 맘 편한 여유도 생겨났다.

다시 싱글이 된 지 어느덧 6년 차. 아인이에게는 삼촌도 생겼다.

“넌 아빠 없어?”

“아니, 나도 아빠 있는데 내가 아빠를 안 좋아해서 같이 안 살아. 대신 나는 아빠보다 좋은 삼촌이 있어.”

평생 아인이를 나만큼 좋아할 순 있지만, 나보다 아인이가 더 좋을 수는 없는 사람. 무조건 아이 입으로 들어가는 불균형한 애정이 당연한 가족이 아닌, 조금은 다른 가족. 이 상황이 싫지 않은 나여서 이런 일들이 생겼던 것일까 가끔 생각해본다. 아마도 이혼이 별 거 였던 건, 결정의 무게감이 아니었을까. 싱글의 삶에 아이를 업고 되돌아오는데 필요한 것들. 스스로의 결심과 주변의 도움, 무엇보다 경제적 상황. 이 세 가지의 무게가 힘든 결혼 생활만큼 무거운 것이기에 그 길은 참 험한 것 같다. 하지만 숨 막힐 것만 같았던 가장의 무게도 결국 20대 싱글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암흑을 각오하고 시작하는 다시 싱글에도 봄은 찾아왔다. 삶은 그렇게 시작과 다시 시작을 반복하며 나아가는 것이라는 걸 마흔 둘,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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