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아고라에서 유쾌한 국뽕이 차오르다

알렉산더의 말발굽과 대한민국의 현재

by 야간비행

1. 문명의 용광로, 아테네의 심장을 걷다

2,400년 전 소크라테스가 거닐던 아고라는 당시 전 세계의 문화가 뒤섞이는 거대한 융합의 장이었다. 남쪽으로는 이집트의 거대한 문명이, 동쪽으로는 페니키아, 시리아, 리디아 등 앞서 발달했던 소아시아의 문물이 에게해로 흘러들어와 뜨겁게 녹아들던 '문명의 용광로'였던 셈이다. 아고라에 세워진 그리스식 신전과 돌기둥들은 이집트의 신전을 벤치마킹한 흔적이 역력했고, 광장 곳곳에 놓인 조각상에서도 이집트의 냄새가 물씬 풍겨났다. 당시 아테네에서 사용하던 화폐와 문화 역시 동쪽 소아시아에서 넘어온 것들이었다. 에게해를 빙 둘러 형성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이처럼 이질적이고 발달된 주변 문명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융합하며, 마침내 자신들만의 찬란한 문명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다.


2. 고대 여신의 땅에 상륙한 'K-뷰티'

소크라테스의 발자취를 상상하며 아고라와 광장 주변을 걷던 중, 수많은 인파가 모인 곳에서 문득 눈에 익은 표식을 발견했다. 한 건물의 간판에 태극기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고, 그 옆에 'Korean Skin Care'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훌쩍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니 한국 화장품을 파는 뷰티 숍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고대 아테네의 심장, 아고라 광장에 한국 화장품 가게라니. 안을 기웃거리며 화장품을 고르고 있는 이들은 모두 관광객이나 현지인으로 보이는 백인 여성들이다.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를 모시는 신전 코앞에서, 현대의 여신들을 아름답게 가꿔줄 화장품이 다름 아닌 '한국산'이라는 사실이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4년마다 올림픽이 열릴 때면, 고대 여사제 복장을 한 그리스 여성들이 태양광을 이용해 올림픽 성화를 채화하는 신성한 의식을 치른다. 문득 저 여사제들도 한국 화장품을 곱게 바르고 성화를 들어 올릴지도 모른다는 유쾌한 상상에 미치자, 가슴 한구석에서 훈훈한 '국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KakaoTalk_20260422_162408099_04.jpg 아고라 광장 한편에 있는 한국 뷰티숍

3. 아고라 한복판에서 팥빙수를 먹고 아파트를 부르다

흐뭇한 기분으로 아고라 옆길을 마저 걷는데, 이번에는 떡하니 한글 간판이 보인다. '문키즈(Moonkids)'라는 이름의 한국식 디저트 카페다. 반가움에 들어가 봤더니 메뉴판에는 팥빙수를 비롯한 한국식 디저트들이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메뉴판은 물론이고, 심지어 '쓰레기는 이리 주세요'라고 한글로 큼지막하게 적힌 쓰레기통까지 곳곳에 한국어의 흔적이 가득하다. 빈자리가 없을 만큼 북적이는 손님들 중 한국 사람은 오직 나 혼자뿐이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 아테네 한복판에 앉아 한국의 팥빙수를 푹푹 떠먹고 있는 진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기분 좋은 발걸음을 옮겨 식당가를 지나치는데, 이번엔 분식점이 나타난다. 쑥 들어가 보니 놀랍게도 현지인이 한국 식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심지어 즉석에서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는 이른바 '한강 매점식' 기계까지 제대로 갖춰놓은 라면집이다. 2,500년 전 전 세계의 문물이 융합되던 아고라에서, 이제는 한국의 음식과 문화가 세계인의 일상과 융합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다니 감개가 무량했다.


놀라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리가 아파 잠시 쉬어갈 겸 들어간 근처 커피숍 스피커에서는 익숙한 전주와 함께 "아파트, 아파트"를 외치는 한국 가수의 노래가 신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고라 뒤편에 자리한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들어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물에 대한 시각 자료를 방영하는 거대한 대형 모니터들마다 큼지막한 'SAMSUNG' 로고가 박혀있었다. 지난 몇 년간 해외 곳곳을 방랑하며 한국 문화의 위상을 여러 번 목격해 왔지만, 서양 철학과 민주주의가 태동한 문명의 용광로 아테네에서 이 펄떡이는 한국의 에너지를 마주하니 새삼 기분이 묘해졌다.

KakaoTalk_20260422_162408099_05.jpg 아고라 길건너에 있는 한국 디저트 카페. 팥빙수가 맛있는 집.

4. 알렉산더의 군마와 대한민국의 궤도

하지만 이 묘한 감정은 곧 거대한 역사의 궤적과 겹쳐지며 전율로 바뀌었다. 2,300년 전, 마케도니아의 청년 알렉산더는 말을 타고 창과 활을 쥔 채 페르시아 군을 궤멸시키며 인도까지 진출해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리고 2026년 오늘, 알렉산더의 군마가 세계를 정복했듯 대한민국의 K9 자주포와 K2 전차가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를 넘어 노르웨이와 폴란드 등 북유럽의 험준한 지형까지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다.


무엇보다 알렉산더의 창과 활이 페르시아 군을 무찔렀듯, 지금 아랍에미리트(UAE)에 수출된 한국의 요격미사일 '천궁-2'가 페르시아의 후예인 이란의 미사일을 요격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묘하고도 짜릿한 대조를 이룬다.


5. 방랑자의 피를 끓게 하는 대한민국의 오늘

최근 인터넷에서 흥미로운 기사 하나를 읽었다. 중동 전쟁 중 고장 난 미국의 항공모함을 수리하려 그리스에 문의했더니 수리 불가 판정을 받아, 결국 한국으로 가져와 수리하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스가 어떤 나라인가. 2,500년 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도화선이 된 숱한 해전과 살라미스 해전에서 막강한 페르시아 함대를 무찔렀던 전통적인 해양 강국이다. 그 피는 현대에까지 이어져 그리스의 조선업은 유럽 최고를 자랑했다. 암살당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이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했을 정도로 그들의 해양 자본과 위상은 대단했다. 그런데 그 그리스마저 고치지 못하는 미국의 항공모함을 한국으로 가져온다니, 이 또한 가슴 한편이 뻐근해질 정도로 뿌듯한 일이다.


알렉산더가 무력으로 정복한 땅 위에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명을 전파했듯,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압도적인 방산과 조선 기술이라는 하드웨어 위에 뷰티, 음식, 그리고 음악이라는 소프트파워를 전 세계인의 삶 속으로 깊숙이 전파하고 있다. 고대 문명의 심장이자 문명 융합의 멜팅팟이었던 이곳 아테네 아고라 한복판에까지 깊숙이 진출하여 세계인의 찬사와 관심을 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재는, 그 어떤 역사책의 기록보다 강렬하게 방랑자의 피를 뜨겁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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