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거사의 하루
7시 알람에 일어나면 얼른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한다. 한집에 여러 명이 지내고 있으니 맥 놓고 있다 보면 30분씩 참고 있어야 한다. 공동욕실 사용이 불편은 하지만 지내다 보면 요령이 생겨서 서로 잘 피해 다닌다. 작년 삿포로 민박집에서는 여주인이 샤워 중인데 내가 욕실문을 열어버린 사고가 있었다. 수차례 “스미마생” 하면서 머리를 조아렸던 당황스러운 순간이었으나 지금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 사건 후 공동욕실 문 열 때는 확인 또 확인하며 내가 욕실 들어갈 때는 욕실 밖에 내 슬리퍼를 벗어놓는다.
바쁠 것 없는 한달살이 인지라 여유 있게 아침식사를 한다. 전날 마트에서 사놓은 여러 식품 중 그날 기분에 따라 몇 가지 꺼내놓는다. 조리가 필요한 것은 감자 찌기 정도이다. 감자는 비닐봉지에 넣고 전자레인지에 7~8분 돌리면 먹을만하게 된다. 빵, 과일, 우유, 햄, 주스, 요플레 등을 이쁜 접시에 담아 발코니 탁자에 놓고 상큼한 아침공기와 바깥경치를 즐기며 천천히 식사한다. 서울아파트 베란다와 프라하 숙소의 발코니는 용도가 다르다. 발코니는 세탁물을 널거나 화분을 두는 곳이 아닌 이웃과의 소통의 장이다. 발코니에서 식사하다보면 옆집 발코니에서 차 마시는 이웃과 서로 인사하며 간단한 대화를 하기도 한다.
동남아에는 누룽지를 가져가서 끊여먹곤 했으나 프라하에는 누룽지를 가져오지 않았다. 프라하는 서양식 조식을 할 수 있는 식품들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식재료 중 빵과 과일은 한국과 비슷하나 우유, 요플레, 치즈등 유제품과 햄은 한국보다 맛이 뛰어나고 저렴하다. “이건 무슨 맛일까?” 하는 기대감에 매일 상표가 다른 식재료를 구입하고 “그래 이 맛이야” 하면서 조식을 챙겨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 홀로 한달살이를 즐겁게 지내기 위해서는 사소한 하나하나에 즐거움을 부여해야 한다.
조식 후 노트북을 둘러메고 노트북 작업이 가능한 카페로 출근한다. 유럽카페는 레스토랑을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음료만 시킨 후 장시간 노트북 작업을 할 수가 없다. 집 주변의 여러 카페를 가봤으나 노트북 작업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네이버 블로그에서 노트북 작업이 가능한 프라하의 카페를 발견했다. 국립박물관 뒤편에 있는 “Cafedu”이다. 이 카페는 프라하에서 거의 유일하게 노트북작업이 자유로운 카페이다. 인터넷으로 예약도 할 수 있어서 대학교 시험기간 중에는 예약만으로도 자리가 차버린다고 한다. 커피와 음료도 4천~6천 원으로 착하며 집에서 공원을 통과하는 경로에 있어서 오가는 자체가 즐거움이기도 하다.
가끔은 집에서 노트북 작업을 하지만 대개는 카페로 간다. 현지인처럼 살아보고 싶어서 해외살이를 하는 것이므로 가급적 현지인이 모인 공간으로 가서 작업한다. 노트북이나 폰을 탁자 위에 두고 잠시 자리를 비우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체코도 한국처럼 안전한 곳인 듯하다. 카페에는 2030 젊은이가 대부분이며 간혹 40대도 보인다. 그러나 5060은 보이지 않는다. 서울 스타벅스에는 노트북 작업하는 5060이 꽤 되는데 프라하 5060은 카페에서 놀지 않고 다른 곳에서 노는가 보다. 카페에서 뉴스검색, 유튜브 보고 글 쓰다 보면 대여섯 시간이 금방 간다. 2시쯤 노트북을 접고 집으로 퇴근한다.
퇴근길에 식당에 들른다. 구글리뷰가 좋은 한국음식점, 중국음식점, 현지음식점 세 곳을 정해놓고 그중 한 곳에 들러 늦은 점심을 해결한다. 한국음식점에 갔더니 체코 현지인이 많았다. 체코인 가족이 고추장을 넣어 비빔밥을 먹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한국음식점에서 비빔밥과 물 한병을 시키면 1.8만, 중국음식점은 1.5만, 현지음식점은 2~4만 원 수준이다. 일주일에 외식비 15만 마트비용 10만 원 정도 소요되어 식비로 1주일 25만 원 한 달 100만 원쯤 들어간다. 65세 이상은 교통비가 무료여서 식비 외에는 카페 음료비 정도만 지출한다.
점심 후 집으로 오다가 집 앞의 마트에 들러 저녁간식과 다음날 아침식사용 장을 본다. 숙소 바로 건너편에 있는 대형마트 “LIDL”은 한국의 이마트 식품코너를 떼어놓은 것과 비슷하다. 온갖 식품과 과일, 빵등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고 가격도 일반마트 대비 저렴하다. 내가 주로 구입하는 빵, 과일, 맥주, 와인, 유제품, 계란, 감자, 햄 가격은 한국마트 대비 30~50% 정도 저렴하다. 한 바구니 가득 채워 계산대에 올렸는데 3만 원 내외여서 어리둥절할 때도 있다. 같은 유제품을 사더라도 이것은 무슨 맛일까? 생각하며 매일 새로운 상표의 제품을 구입한다. 한 달 동안 다양한 상표의 제품을 다 먹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매일 다른 제품을 구입하고 있다.
숙소에 도착하면 쉬거나 세탁을 하고 햇빛이 누그러드는 6시쯤 집을 나선다. 한두 시간 공짜 트램과 지하철을 타고 이쪽저쪽을 무작정 다니면서 길가의 풍경을 감상한다. 트램은 통유리로 되어있어 시야가 아주 좋다. 시야 좋은 자리에 앉아 경치를 즐기다가 마음 내키는 곳에서 내려 잠시 둘러보고 다시 바꿔 타고 프라하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 도시 대부분이 5~6층짜리 중세풍의 건물로 되어 있어서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건물만 보고 있어도 흥미진진하다. 서울의 지공거사들이 지하철로 춘천, 천안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구경 다닌다고 하던데 나는 프라하의 지공거사로 프라하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고 있다. 표검사는 잘 하지 않으나 반드시 여권을 지참해서 표검사시 보여줘야한다.
여름철 프라하는 해 질 무렵부터 활력을 띠기 시작한다. 따가운 햇빛을 피해 실내에 있던 사람들이 해질 무렵 쏟아져 나온다. 나도 8시쯤 되면 야경을 즐길 수 있는 멋진 장소로 이동한다. 프라하를 관통하는 블타바강을 따라 비셰흐라드, 카를교, 댄싱하우스, 프라하성등 노을과 야경을 즐길 수 있는 명소가 많다. 이중 한 곳에 내려 인파 속으로 들어가 프라하의 밤을 함께 만끽한다. 프라하의 노을은 특별하다. 산 위에 우뚝 서있는 프라하성 뒤편으로 해가 내려가면 하늘이 붉게 물들면서 프라하 성과 비투스 성당의 뾰족한 첨탑들이 붉은색에서 차츰 검은색으로 변해가고 해가 완전히 내려가면 주황색의 조명이 들어오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로 변한다. 이 때문에 프라하성이 보이는 명소마다 노을을 즐기려는 인파로 북적인다. 바구니에 와인과 와인잔을 챙겨 온 청춘남녀들이 노을을 바라보며 와인잔을 부딪치는 모습은 영화 한 장면처럼 낭만 가득이다.
나는 해가지면 걷기 운동을 시작한다. 빠른 걸음으로 매일 15000보 내외 8~9킬로를 걷는다. 집으로 가는 길은 다양하지만 블타바 강변을 4킬로쯤 걸은 후 그날 기분에 따라 관광지를 거치는 코스, 주택가를 거치는 코스, 공원을 거치는 코스를 선택하고 집까지 걸어온다. 어느 코스를 택하던 사람이 많지만 특히 카를교, 시계탑, 화약고, 바츨라프광장, 국립박물관 부근은 프라하의 야경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이다.
프라하가 아름다운 것은 멋진 중세의 건물들 때문만은 아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청춘남녀들의 생기발랄한 모습이 프라하를 더 멋있게 한다. 사람들 역시 도시의 일부이다. 사람들이 멋지면 도시가 더 멋져 보인다. 프라하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멋지고 매력적이다.
우즈베키스탄에 가면 김태희들이 밭일하고 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우즈베키스탄 여인중 미인들이 많다는 얘기이다. 지난달 우즈베키스탄에 가서 물었더니 구 소련시절 살던 슬라브계통 여성들이 미인이고 원주민은 아니라고 한다. 체코가 슬라브족이며 그중에서도 체형이 가장 예쁘다는 서슬라브족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사라진 김태희들이 프라하 거리에 넘쳐난다. 인형같은 슬라브 미인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흐믓해진다.
프라하는 유럽에서도 관광객이 많은 편이다. 여유 있는 사람들이 관광을 다니며 관광지에 어울리는 예쁜 복장을 하고 다닌다. 아름다운 도시에 멋진 사람들이 깔끔한 옷차림으로 다니는 것을 보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다. 밤에 프라하의 거리를 걷는 것은 운동도 되지만 아름다운 거리와 멋있는 모습의 사람들을 보면서 저절로 행복 호르몬이 뿜어져 나온다
프라하 거리의 인파는 거의 백인이다. 체코 현지인이거나 관광온 유럽 사람들 일 것이다. 가끔 보이는 동양인은 여지없이 한국인이다. 프라하에는 중국인과 일본인을 볼 수가 없다. 일본은 엔저로 소득이 깎여버렸고 중국은 경제위기로 치닫고 있어서 비싼 유럽여행을 할 수 없는 모양이다. 한국이 잘 사는 것이 느껴진다. 젊은 대학생부터 은퇴한 60대까지 많은 한국인들이 프라하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닌다. 프라하에 여행 오는 한국인들을 보면 복장이 단정하고 피부가 좋다. 나이에 무관하게 깔끔한 모습으로 다니는 것이 보기 좋다. 2030 딸과 5060 엄마가 함께 다니는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두 시간 정도 구시가지 이곳저곳을 걷다가 10시쯤 숙소로 돌아오면 발코니로 나가서 혼술을 하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프라하는 공기가 맑아 발코니에서 하늘의 별이 또렷이 보인다. 북두칠성과 건너편 아파트 불빛을 바라보며 혼술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체코는 맥주와 와인 그리고 함께 먹을 치즈, 햄, 땅콩, 과일 등 안주거리가 참 싸고 맛있다. 최고의 술과 안주로 매일밤 행복하다. 가끔은 다른 여행객과 함께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잘 안 되는 영어 하는 게 피곤해서 그냥 혼술 한다. 혼술 하다 알딸딸 해지면 침실로 향한다.
프라하 오기 전 감기가 걸렸다. 여기 온 후 자다가 깰 정도로 기침이 심해졌는데 한국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는데도 차도가 없다. 해외 나가면 제일 걱정되는 게 아플 때이다.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을는지 치료비는 얼마나 나올 건지 걱정이다. 한국에서 지어온 약을 먹어도 기침이 더욱 심해져서 프라하에 있는 약국을 찾았다. DM이라는 약국체인인데 간단한 의약품과 건강보조제등을 판매한다. DM에 가서 통역기로 내 증세를 얘기했더니 약을 추천해 준다. 간단한 병은 DM에 가서 약을 처방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프라하의 여름은 에어컨 없이도 견딜만하다. 간혹 30도가 넘어가는 날씨이지만 습도가 낮아서 그늘에만 있어도 시원하며 해가 진 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대부분의 집에는 에어컨이 없으며 심지어 식당이나 가게에도 에어컨 없는 곳이 수두룩하다. 겨울에도 그렇게 춥지 않다고 하니 사람살기에 참 좋은 곳이다. 프라하에는 모기가 없다. 숙소 창문에 방충망이 없어서 모기걱정을 많이 했는데 여태껏 모기 한 마리 보지 못했다. 강가 밴치에 앉아 있어도 모기가 물지 않는다. 모기 없고 덥지 않는 곳이라서 여름 피서지로도 괜찮아 보인다. 한달이나 살거면서도 하루가 지나가는게 아까울 정도로 프라하에 푹 빠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