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4.2. 일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앞으로 3개월간 이스탄불, 부다페스트, 비엔나에서 한달살이 할 계획이다. 지난겨울 3개월을 보낸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한국에서 가깝고 외모도 비슷해서 낯설지가 않았는데 유럽으로 오니 먼 타향에 온 듯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스탄불은 324년부터 1927년까지 1600여 년간 로마제국, 비잔틴제국, 오스만제국의 수도였다. 오랜 세월 세계를 좌지우지했던 제국의 수도였던 만큼 지정학적 위치가 뛰어나고 역사유적이 많으며 서사가 많은 도시이다. 지금도 인구 1600만 명의 세계 5번째의 거대도시이며 세계 두 번째로 여행객이 많은 관광도시이다. 2024년 2800만 명이 이스탄불을 찾았다고 한다. 관광객이 이스탄불에 이삼일 머문다고 하면 매일 20만 명쯤 되는 외국 관광객이 이스탄불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는 셈이다. 이스탄불 구도심은 항상 외국관광객으로 북적인다.
해외 도시에서의 한달살이는 숙소위치에 따라 생활방식이 결정된다. 이스탄불에서는 도시의 역사를 체감할 수 있도록 구도심에 숙소를 정했다. 지난 1월 구글지도와 여행 유튜브 등을 참조하여 지역을 탐색한 후 에어비엔비에서 가성비 좋은 숙소를 선정했다. 예약 전 까지는 숙소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지 않지만 숙소 리뷰와 구글지도를 교차 탐색하면 거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 주변의 교통, 마트, 식당, 카페, 공원, 걷기 좋은 코스 등을 고려하고 집 내부의 시설, 집기, 주방등을 꼼꼼히 살펴서 숙소를 예약했다. 공들여 숙소를 찾았던 덕분인지 지금까지 열 번의 해외 한달살이 중 대부분 만족스러운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
이스탄불은 볼거리가 많다.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아야소피아, 테오도시우스 성벽, 블루모스크, 톱카프 궁전, 갈라타 탑, 지하 물저장소, 돌마바흐체 궁전 같은 세계적인 역사유적이 곳곳에 널려있다. 유명한 역사유적만큼의 명성은 없지만 이런 것도 있었어? 하며 놀랄만한 잔잔한 역사유적도 도처에 나타난다. 과거의 역사, 예술, 문화를 전시하는 박물관도 많으며 그랜드 바자르를 비롯한 오래된 시장이 이곳저곳에 산재하여 구도심 전체가 볼거리이다. 보스프러스 해협, 금각만, 마르마라 해에 접해있어서 기다란 해변이 아름다우며 바다에서 보는 도시의 전경은 거대한 모스크와 탑들로 인해 독특한 역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한달살이는 관광이 목적이 아니다. 도시의 일원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매달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여 서울에서 사는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아침 5시 반쯤 되면 모스크의 아잔소리에 잠을 깬다. 튀르키에가 세속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이슬람 국가여서 하루 다섯 번 기도시간마다 아잔소리가 온 도시에 요란스럽게 울려 퍼진다. 아잔소리를 닭 꼬끼오 울음소리라 생각하고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어디로 이사하건 나 홀로 살아가는 하루 일과는 비슷하다. 학생이나 직장인들의 하루 일과가 비슷하듯이 은퇴자들의 일과도 대부분 비슷하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은퇴자 모두 비슷할 것이다. 나 역시 서울에서건 발리에서건 이스탄불에서건 동일한 루틴으로 살아간다. 먹고, 자고, 일하고, 운동하고, 놀면서 하루를 보낸다.
잘 자고 잘 먹어야 한다. 서울에서 이스탄불에 오면서 1인용 전기장판을 들고 왔다. 과거 유럽 여행하면서 5월에도 밤에 쌀쌀했던 기억이 있어서 전기장판을 들고 왔다. 이스탄불의 4월 초는 한국의 4월 초보다 더 춥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온종일 5도 내외의 차가운 날씨이다. 밤에 난방을 한다고는 하지만 으스스한다. 전기장판 켜좋고 뜨끈뜨끈하게 지지면서 자는 맛이 꿀맛이다. 전기장판이 없었으면 작년 캠핑카 여행 때처럼 옷을 몇 개씩 껴입고도 덜덜 떨며 잠을 설쳤을 것이다.
한달살이 중 식사는 어디를 가나 동일한 패턴이다. 아침은 빵, 과일, 우유, 계란등으로 하고 점심 겸 저녁으로 식당에서 사 먹으며 저녁에 배가 출출하면 간식이나 맥주 한 캔으로 해결한다. 이스탄불 식당은 대부분 20개 정도의 메뉴가 있고 케밥이 주요 메뉴이다. 식당 몇 군데에서 이것저것 먹어봤는데 맛이 영 아니다. 맛도 별로고 간도 맞지 않다. 어떤 것은 짜고 어떤 것은 싱겁고 종잡을 수가 없다. 한두 번 경험으로 먹어볼 수 있으나 매일 식사로 하기에는 고역이다. 여행유튜브나 블로그를 보면 터키음식이 다양하고 맛있다고 칭찬일색이던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얘기하는지 모르겠다. 다양하고 감칠맛 나는 한국음식이 최고인 듯한다.
케밥이 질리면 라면이나 누룽지 또는 햇반에 3분 짜장으로 해결한다. 전 세계 어디를 가나 라면과 김치를 살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스탄불 아시안마켓에 갔더니 한국라면과 김치를 팔고 있다. 중국사람이 담근 김치도 먹을만하다. 라면이 5천 원으로 비싸긴 하지만 2만 원짜리 맛없는 케밥 먹느니 만원 들여서 라면에 계란 넣고 김치에 먹는 것이 훨씬 만족스럽다. 이스탄불까지 가서 빵, 라면, 햇반, 누룽지 먹으며 궁상떤다고 할지 모르겠다. 어쩌다 해외여행하는 사람이야 한국에서 허리 졸라매고 한번 해외 나갈 때 맛있는 거 먹으면서 호사를 누려야겠지만 1년에 300일 이상 해외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기분 내다보면 파산한다. 나는 해외에서 짠물생활 하면서 절약하고 한국에 귀국하면 지인들 만나 밥도사고 외식하면서 호사를 누린다. 세계 여러 곳 다니면서 이것저것 먹어봐도 한국의 한우, 회, 동태탕, 김치찌개, 묵은지 삼겹살이 최고이다. 해외에서는 라면, 누룽지, 햇반으로 짠물생활 하고 한국 귀국해서 맛있는 거 사 먹으며 호사를 누리는 게 오히려 만족도가 더 높다.
이스탄불의 장바구니 물가는 동남아와 한국의 중간 정도이다. 마트에서의 아침식사용 식품가격은 한국의 절반 정도이며 의류, 신발 등 생필품 가격과 버스, 지하철 등 교통비도 한국보다 저렴하다. 운 좋게 가끔 서는 재래시장 만나면 마트의 절반 가격이어서 쇼핑의 재미를 톡톡히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관광지에서의 식사비는 한 끼 2만 원 정도로 한국보다 비싼 편이다. 버거킹에서의 햄버거 세트도 15000원 정도이다. 관광지를 돌아다니며 식사하면 경비가 많이 들겠지만 현지인처럼 동네마트에서 해결한다면 동남아와 한국 중간정도의 비용으로 저렴하게 한 달을 보낼 수 있다.
먹고 자는 게 해결되고 나면 일하고 운동하고 놀면 된다. 돈 벌어야 할 필요 없는 은퇴자에게는 일, 운동, 노는 것 모두가 노는 것이다. 잘 놀아야 한다. 노는 것처럼 일하고 노는 것처럼 운동하면서 하루를 즐겁게 보내면된다. 나는 한달살이 중 카페에서 노트북으로 글 쓰거나 유튜브 보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이스탄불에서는 노트북 작업할 수 있는 카페가 안 보인다. 카페는 많으나 좌석이 몇 개 안 되어 노트북 펴고 있을 분위기가 아니다. 집에서 노트북으로 노는 듯 글도 쓰고 유튜브도 보다가 오후가 되면 나가서 걷는다. 프놈펜이나 비엔티안에서는 호텔 수영장과 헬스장에서 운동할 수 있었으나 이스탄불에서 운동은 걷기이다. 걷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은 운동이라고 하니 열심히 걸으면서 건강을 챙긴다. 즐겁게 걷기 위해서는 코스가 좋아야 한다. 이스탄불에서는 걷는 자체가 관광이자 즐거움이다. 도시 구석구석 어느 곳을 걸어도 볼거리가 있고 서사가 있고 역사가 스며있다.
매일 오후 세시까지 집에서 노트북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세시가 되면 집을 나가 걷는다. 나가기 전 날씨를 보고 그날의 코스를 정한다. 해변코스를 걸을 것인지, 구시가지의 역사유적지를 걸을 것인지 신시가지의 번화가를 걸을 것인지를 결정한다. 내가 선호하는 코스는 버스로 이스탄불 최고 번화가인 탁심광장으로 가서 서울의 명동과 비슷한 이스티클랄거리를 지나 갈라타 타워로 그리고 갈라타 다리를 건넌다. 구시가지로 간 뒤 궐하네 공원, 톱카프궁전, 아야소피아, 블루모크, 히포드롬이 있는 핵심유적지를 지나 그랜드 바자르를 거쳐 바닷가로 내려온다. 바닷가를 걸어서 숙소로 돌아오는 총 10킬로 정도의 거리이다.
구도심 속에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골목길을 걷다 보면 아라비안 나이트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면서 걷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10킬로 걷는데 세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이코스는 이스탄불 관광의 핵심지역이라서 항상 관광객이 넘쳐난다. 매일 이삼십만 명의 관광객이 이 지역을 돌아다니는 셈이니 항상 인파가 넘쳐나며 다양한 관광객들 마저 좋은 볼거리이다.
걷는 모든 지역이 흥미진진하지만 갈라타 다리 위를 걷는 것은 특별한 즐거움이다. 450미터 길이의 다리 양편으로 낚시꾼들로 꽉 차있다. 얼핏 봐도 수백 명이다. 낚시꾼들을 자세히 보면 대부분이 늙수그레한 어르신들이다. 서울의 탑골공원에 서울의 어르신들이 모여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이스탄불의 어르신들은 갈라타 다리 위에 낚싯대를 들이우고 한가로이 시간을 보낸다. 낚시꾼마다 잡은 고기를 물통에 보관하는데 물통마다 제법 많은 고기가 돌아다닌다. 보스프러스 해협이 물 반 고기반인 모양이다. 이스탄불은 금각만, 보스프러스 해협, 마르마르해에 둘러싸여 있어서 해변 길이만 50킬로가 넘는다. 해변마다 이스탄불의 어르신들이 앉아서 낚시를 하고 있다. 세계 모든 나라가 노령화로 노인이 늘어나고 할 일없는 노인들이 시간 보낼만한 곳이 변변찮은데 이스탄불 노인들은 낚시터라는 아주 좋은 놀이터를 가지고 있어 부럽다.
갈라타 다리를 건너 톱카프 궁전 쪽으로 가다 보면 톱카프 궁전의 정원인 축구장 서너 개 크기의 궐하네 공원이 나온다. 귈하네가 장미라는 뜻이니 장미공원이다. 내가 도착한 4월 초는 튤립이 막 피어나는 시기이다. 형용색색의 꽃들이 온 공원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공원을 한 바퀴 돈후 꽃 사이의 벤치에 앉아 잠시 쉰 후 다시 걷는다. 새까만 차도르를 입고 얼굴까지 가린 무슬림 여인들이 꽃을 배경으로 서로 사진 찍어주는 모습이 엽기적이다. 눈만 나오는데도 사진이 찍고 싶은가?
궐하네 공원 바로뒤에는 톱카프 궁전, 아야소비아, 블루모스크, 히포드롬, 지하물저장고 등 이스탄불의 핵심 유적지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세계적인 유적지가 몰려있다 보니 항상 관광객으로 인산인해이다. 몇 번 까지는 역사유적들의 웅장함과 그 시대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슴 벅차더니 열 번쯤 그 거리를 지나가다 보니 유적보다는 광장에서 파는 아이스크림과 정원의 꽃들에 눈길이 더 간다. 이스탄불은 유럽국가처럼 화장실 사용료가 있으나 모스크 내에서는 무료이다. 탁심광장부터 한 시간쯤 걸어 블루모스크에 도착하여 공짜 화장실을 즐긴 후 그랜드 바자르로 향한다. 엄청난 역사유적인 블루모스크가 나에게는 매일 들리는 공짜 화장실이 되었다.
그랜드 바자르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시장답게 미로처럼 얽힌 길을 따라 온갖 물건이 진열되어 있다. 상품이 예쁘게 진열되어 있어서 지나가면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매일 미로 같은 골목을 바꿔 걸으며 운동 겸 눈요기를 즐긴다.
구도심의 역사지역을 걷고 숙소로 돌아올 때는 바닷가로 내려와 해변길을 걷는다. 한강을 따라 공원이 조성된 것처럼 이스탄불의 바닷가는 공원과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 있다. 갈매기와 고양이들이 바닷가 공원에 가득하다. 수많은 인파 속을 걷다가 한적한 바닷가 길을 걸으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에 모여드는 갈매기와 고양이들의 행복한 모습과 잔잔한 바다의 모습을 보며 집으로 향한다. 집 앞 마트에서 다음날 식사용 장을 보고 귀가한다. 폰의 걸음수가 18000을 가리킨다.
한달살이 하는 곳마다 매일 15000보 정도 걸으며 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보는데 이스탄불이 가장 볼거리가 많고 흥미진진하다. 작년 프라하 도심 걷는 것도 좋았지만 이스탄불은 프라하보다 규모가 훨씬 크고 서사와 볼거리가 월등하다. 지난달 발리의 파랑파랑한 대자연을 걸을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한달살이를 마치는 날까지 이스탄불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며 2천 년간 제국의 수도였던 역사의 흔적을 음미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