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시우스 성벽 걷기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할 만큼 전쟁이 역사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역사 이래 수많은 전쟁이 있어왔으며 전쟁이 가장 많이 벌어진 장소는 성벽이었다. 16세기 대포가 발전하여 성벽의 방어역할이 감소하기 전 까지는 모든 중요한 도시는 성벽을 만들어 적의 침략을 대비했으며 성벽이 뚫리는 것은 패배와 죽음을 의미했다. 역사상 가장 튼튼했던 난공불락의 성벽이 이스탄불에 있다. 유럽에 수많은 성과 성벽이 있고 중국에도 만리장성을 비롯한 많은 성벽들이 있었지만 수백 년을 견디지 못하고 주인이 바뀌었다. 이스탄불의 성벽은 1000년 간 23번의 공격을 막아낸 최고의 독보적인 성벽이다.
이스탄불의 과거 이름은 비잔티움이다.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고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기원전 7세기부터 제국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리스, 페르시아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각축하였으며 BC477년부터 그리스의 영토였다가 AD196년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그리스 시대부터 도시가 요새화되었으며 로마의 포위공격을 3년간이나 버텨낼 정도로 오래전부터 튼튼한 성벽을 갖추고 있었다.
330년 비잔티움으로 천도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존의 성벽을 보강하여 방어력을 높였으며 이후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성벽이 외곽으로 확대되고 3중 방어체제로 강화된다. 이때 강화된 6.5킬로에 달하는 육지 쪽 성벽은 강력한 3중 구조로서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불린다. 전면에 20미터에 이르는 해자를 설치했고 이후 3단계의 성벽이 버티고 있다. 1단 성벽은 해자뒤에서 몸을 숨기고 활을 쏠정도의 간단한 성벽이지만 2단은 8미터 높이에 5미터 두께이며 마지막 3단은 높이가 12미터 너비가 5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이다. 성벽에는 적군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96개의 탑이 있어서 당시의 어떠한 공성장비로도 돌파가 되지 않는 강력한 성벽이었다. 15.5킬로에 달하는 3면의 해안에는 바다라는 천연방어벽을 고려하여 단독성벽으로 만들어졌지만 육지 쪽의 3단 성벽과 같은 5미터 두께에 12 미터 높이의 강력한 규모로 세워졌다.
이스탄불의 성벽은 1000년간 23번이나 월등한 숫자의 공격군으로부터 도시를 지켰으나 1453년 오스만제국의 강력한 대포와 메흐메트 2세의 천재적인 전술에 의해 점령됨으로써 2천 년 역사의 로마가 막을 내리게 된다. 비잔틴제국의 몰락은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원동력이 되고 대항해 시대가 열리는 역사의 변곡점이 되었다.
이스탄불에는 아야소피아를 비롯한 많은 역사유적이 있지만 테오데시우스 성벽이 가장 역사가 깊으며 서사가 많다. 서유럽을 망하게 한 훈족의 아틸라가 쳐들어 왔다가 성벽의 규모에 놀라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한 사건. 지진으로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아틸라 군이 다시 왔더니만 비잔틴 군이 삽시간에 성벽을 수리해 버려 다시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흥미로운 역사. 성벽에서 20여 차례나 이민족의 공격을 막아낸 다양한 전술과 무기들. 물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화염탄으로 적군을 불살라 버렸다는 신무기 그리스의 불. 바다를 쇠사슬로 막아서 적선을 못 들어오게 한 기발한 전술. 배를 산으로 이동시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는 세계 역사상 유일한 전술. 거대한 대포를 사용해 성벽을 부수는 전술이 처음 등장한 전쟁 등 숱한 역사와 서사를 간직하고 있다.
수백 수천 년을 견디어 온 성벽은 다양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성벽 내의 도시는 변하고 발전하지만 성벽은 묵묵히 그 자리에서 도시를 지켜보며 서있다. 성벽은 도로와 건물로 가득 찬 삭막한 도시에 훌륭한 예술품이 되어 도시의 품위를 높여준다. 성벽 한 바퀴를 돌아보는 것은 역사의 흔적을 따라가 보는 생동감 넘치는 역사 공부이다. 성이나 산속의 요새는 소수의 권력자를 위한 역사이지만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도성은 시민 전체의 안위를 지켜준 모두의 역사이다. 구간구간마다 역사가 있고 서사가 있다. 국가마다 성과 성벽은 중요한 문화제로 지정하여 잘 관리하고 있어서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걷고 싶어 하는 좋은 코스이기도 하다.
나는 여행 중 성이나 성벽이 있으면 무조건 찾아간다. 성 내부를 관람하고 성벽을 따라 도는 것은 과거 역사를 이해하고 음미하는 좋은 방법이다. 한국의 성은 모두 걸었고 유럽여행 중 수없이 많은 성을 찾아다녔다. 역사공부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걷기를 더 좋아해서 가급적 시간을 내어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돌았다. 작년 한달살이 하던 프라하에서는 수시로 프라하성과 비셰흐라드 성을 걸었으며 태국 치앙마이에서는 치앙마이 성곽을 걸었다. 여행 중 두브로브니크 성벽 위를 걸었으며 중국의 시안 성벽 위를 자전거로 돌았다. 실크로드 여행 중 고창고성과 교하고성을 그리고 둔황 인근의 양관과 옥문관에서는 중국 초기의 만리장성 터를 걸었다.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의 아르크성과 히바의 이찬칼라성도 돌아보며 당시의 모습을 연상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스탄불의 성벽을 한 바퀴 걸으면서 2천 년간 이곳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상상했다. 성벽은 육지 쪽 6.5킬로 바닷가 15.5킬로 총 22킬로 거리이다. 맘먹고 걸으면 하루 만에 걸을 수도 있겠지만 이틀에 걸쳐 성벽 안길, 바깥길을 번갈아 걸어보고 성벽 위에 올라가기도 하면서 천년역사를 음미했다. 구간구간마다 역사와 서사가 가득하다. 첫날은 육지 쪽 성벽을 걸었다. 전쟁사에 관심이 많아서 역사유적을 볼 때는 전쟁의 관점에서 유심히 살펴본다. 23번의 큰 전쟁을 치른 성벽 앞에 서니 과거 전쟁의 모습들이 그려진다. 해자와 3중의 성벽을 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불가리아 제국군과 이슬람 군인들 그리고 이들을 막기 위해 성벽 위에서 활을 쏘고 화염탄을 쏘아대는 비잔틴의 군인들이 떠오른다. 해자와 3중 성벽의 사이마다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죽었을까? 40년마다 한 번씩 1000년 동안 이 성벽 돌파를 시도하다가 수많은 시체를 성벽 앞에 남겨두고 퇴각했을 것이다. 6.5킬로의 성벽 밖에는 수많은 병사들이 피가 뿌려졌을 것이며 과거 피바다였던 곳이 지금은 밭으로 변해 농민들이 야채를 키우거나 녹지공원으로 변하여 시민들이 소풍을 즐기고 있다.
바닷가 쪽의 성은 육지 쪽에 비해서 검소하다. 마르마라 해 쪽의 바닷가 성벽은 3중 구조가 아닌 하나의 성벽만 세워져 있다. 파도와 조류가 심하고 바닷가가 바위 투성이어서 상륙이 어려운 구조라서 성벽이 육지에 비해 덜 견고하다.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할 당시에도 마르마라 해 쪽에서는 공격할 염두를 내지 못했다. 어렵게 산을 가로질러 금각만 안쪽으로 배들을 옮긴 다음 공격했던 것도 바위 투성이의 마르마라 해 쪽에서 공격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쪽의 성벽은 도시팽창에 따라 많은 지역이 도로로 변했고 성벽을 철거한 자리에 커다란 해변공원이 들어서 있다. 거대한 해변공원은 서울의 한강 공원처럼 시민들의 휴식처로 변했다. 다만 톱카프 궁전 앞쪽에는 성벽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어서 과거의 모습을 보여준다.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어서 몇 년 후에는 비잔틴 제국시절 마르마라 해 쪽의 성벽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금각만 안쪽의 성벽은 대부분 철거되고 도시의 일부가 되거나 도로로 변했다. 바닷가는 공원과 산책로로 바뀌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마르마라 해 쪽과 달리 금각만 내부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과거 해상무역을 위한 항구가 금각만 안쪽에 위치했고 방어를 위한 해군전력도 금각만 내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금각만 쪽의 성벽은 육지 쪽처럼 튼튼하긴 하지만 3중이 아닌 하나의 성벽만으로 되어있다. 바다 자체가 좋은 방어벽이었고 적군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금각만 입구를 쇠사슬로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지 쪽만큼 견고한 성벽을 만들어 놓지 않은 결과는 1000년의 역사가 사라지게 된 결과를 초래했다. 과거 쇠사슬로 된 장애물을 설치하여 적선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자리에는 갈라타 다리가 들어서서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이어주고 수많은 어르신들의 낚시터가 되었다.
1000년간 최고방어력을 보여준 난공불락의 성벽은 1453년 오스만 터키에 의해 상당 부분 파괴되었다. 20세기 까지는 파괴된 성벽을 복구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였다고 한다. 대포가 점점 발전되어 요새나 성벽의 방어력이 저하됨에 따라 성벽을 보강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가 팽창함에 따라 오히려 성벽을 부수고 건물을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18세기에는 돌마바흐체 궁전을 성밖에 건설할 정도였으니 도시를 빙 둘러싸고 있는 성벽이 도시방어에 중요하기는커녕 오히려 도시발전에 거추장스러웠을 것이다.
도시가 현대화되면서 많은 도시들에서 과거의 성벽이 해체되고 성벽의 자리가 도로나 새로운 건축물로 대체되었다. 오스만 제국을 격퇴하여 유럽의 이슬람화를 막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성벽은 완전 철거되어 트램과 버스가 다니는 도로가 되었고 한양도성 역시 남산과 북악산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철거되어 흔적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몇몇 도성은 그대로 남아서 옛 모습을 보여주고 관광명소가 되기도 한다. 중국의 시안성벽은 거의 파괴되었으나 1980년대부터 20년간의 노력으로 과거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으며 프라하 성이나 두브로브니크 성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세계화로 인해 관광객이 증가하고 관광수입이 국가나 도시를 먹여 살리는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성벽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것이 도로를 넓히거나 건물을 세우는 것에 비해 더 유익한 시대가 되어 국가마다 과거의 성벽을 복원하고 있다.
1차 대전 이후 오스만 터키는 소멸하고 독립영웅 아타튀르크에 의해 터키가 독립한다. 터키가 독립하자 그리스에서 거주하던 수많은 터키인들이 이스탄불로 쫓겨 왔으며 잘 곳 없던 난민들은 성벽에 붙여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이슬람 특성상 잘 곳 없는 난민을 매몰차게 쫓아내지 못하여 지금도 성벽을 벽으로 삼아 지어진 집들이 많다. 성벽을 돌다 보면 성벽을 반쯤 허물고 그 위에 지은 집, 성벽사이를 허물고 양쪽면을 벽으로 삼아 지은 집, 성벽에 구멍을 내어 집 대문으로 만든 집 등 기가 막힌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현대에 들어 복원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육지 구간 중 복원된 곳은 10~20% 정도이고 10~20% 정도는 도로로 변해 사라졌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파손된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과거 해자였던 곳은 흙으로 메꿔져서 농부들이 야채를 경작하거나 녹지공원으로 변하였다. 20년 전 이스탄불에 갔을 때는 폐허 정도가 아주 심했는데 지금은 많은 곳이 개선되고 복원되었다. 지금도 여러 곳에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육지 쪽 6.5킬로 성벽은 비잔틴 시대처럼 모든 성벽을 다시 복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성벽 밖으로는 과거 해자가 있었던 곳까지의 공간을 공원으로 만들거나 3중 성벽으로 복원하고 있으며 성벽 내부로는 성벽을 이용해 지어진 집들을 철거하고 도로나 공원으로 만들고 있다. 20년 후쯤이면 모든 구간에 복원이 완성될 듯하다. 지금은 성벽 안팎으로만 걸을 수 있지만 복원을 마치면 두브로브니크 성벽이나 시안성벽처럼 성벽 위를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복원 후 다시 와서 테오도시우스 성벽 위를 걸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