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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한달살이: 어색한 동거에서 얻는 깨달음

by 야간비행

정년퇴직 후 3년째, 혼자 해외여행을 하고 있다. 10년 동안 100개국, 50개 도시에서 한 달씩 살아보는 것이 목표다. 자동차 여행, 캠핑카 여행, 오지 배낭여행, 패키지 여행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느끼고 있다. 여행은 자유롭고 평온하다. 하지만 한 달 살이처럼 혼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문득 외로움이 찾아오기도 한다. 사람의 온기가, 대화의 온도가 그리워진다.


지금까지 대부분 혼자 지냈지만, 이번 비엔나 한 달은 조금 다르다. 이번 숙소는 사비네 란 여성이 혼자사는 집의 방 한 칸을 빌린 형태다. 일종의 하숙이다. 60세의 그녀와 나는 함께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 처음엔 조금 어색했지만, 지금은 그 어색함조차 편안한 동거가 되어가고 있다.

KakaoTalk_20250620_013603837_02.jpg 비엔나의 숙소건물: 구시가지 부근의 건물들은 대부분 이런 모습이다

사비네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상담 관련 일을 하다 몇 년 전 은퇴했다. 평소 글쓰기를 좋아했는데, 혼자 사는 시간이 길어지며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미 세 권의 추리소설을 출간했고, 지금도 집에서 후속작을 집필 중이다. 나처럼 여행도 좋아하고, 글도 쓰는 사람. 왠지 모르게 닮은 점이 많다.


우리는 각자의 방에서 글을 쓴다. 사비네는 하루의 대부분을 컴퓨터 앞에 앉아 보내고, 나 역시 오전엔 노트북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 두 사람의 방 사이에는 주방이 있어 가끔 마주친다. 그럴 땐 서로 미소 지으며 차를 마시거나, 짧은 대화를 나눈다. 아침이면 각자 식사를 준비해 같은 식탁에 앉는다. 나는 누룽지를, 사비네는 빵을 먹는다. 서로의 음식을 권하며 소소한 따뜻함을 나눈다. 사비네가 누룽지를 맛있다며 좋아해, 가끔 나눠주기도 한다.

KakaoTalk_20250620_013603837_01.jpg 내 방에서 노트북 작업: 비엔나는 카페에서 긴 시간 노트북 작업을 할 수 없다.

저녁식사는 마트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 오면 사비네를 불러 함께 먹는다. 그녀는 본인이 만든 요리를 나에게 나눠준다. 사비네는 한 번에 많은 양의 음식을 만들어 며칠씩 나눠 먹는 스타일이다. 파스타 소스를 한 냄비 끓여 며칠간 먹기도 하고, 야채볶음을 만들어 김치찌개처럼 끓여두고 먹기도 한다. 가끔 그녀가 만들어둔 음식을 덜어 먹는데 별 맛은 없다.


서로 영어가 서툴지만, 표정과 손짓으로 마음을 전한다. 글쓰기와 여행 이야기를 주로 나눈다. 그녀는 젊었을 때부터 유럽 곳곳을 여행했단다. 사진을 보여주며 서로의 여행을 이야기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아쉬운 건 그녀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 나는 와인, 그녀는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떤다. 오랜만에 말벗이 생긴 나도, 집에서 혼자 글만 쓰던 그녀도 식탁에 함께 앉은 시간이 즐겁다. 가끔은 혼자 폭풍 수다를 떨다가, “내가 너무 말이 많지요?” 하고 웃으며 다시 말을 잇는다. 지금까지 머물렀던 투숙객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대부분 2030 여성 여행자들이었고, 간혹 출장 온 남성도 있었단다. 한 번은 80대 미국 할아버지가 한 달을 지내던 중 쓰러져, “송장 치우는 줄 알았다”며 너스레를 떤다.


어느 날은 그녀의 친구 두 명이 집에 놀러 왔다. 내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했는지, 나를 보겠다며 찾아온 것이다. 오스트리아 여인 세 명과 식탁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영어가 짧아 동문서답도 많았지만, 웃음은 끊이질 않았다. 그들은 함께 음식을 만들고, 뜨개질을 하며 놀고, 서로 머리를 잘라주고 염색까지 해주며 하루를 보냈다. 염색할 때는 사비나가 옷을 벗고 있으니, “나오지 마세요!”라는 말에 한 시간 동안 내 방에 갇혀 있기도 했다.

KakaoTalk_20250620_013603837.jpg 내 방에 연결된 주방: 깔끔한 주방과 새하얀 식탁

비엔나에서 나는 새로운 방식의 삶을 체험 중이다. 함께 살지만, 서로의 삶을 침범하지 않는 방식. ‘따로 또 함께’가 아니라 ‘함께 또 따로’의 삶. 남녀가 한집에 살아도 간섭은 없고, 거리감은 유지된다. 나는 75세까지는 여행 작가로 살아가고 그 이후엔 한국에 정착해 공부와 취미를 즐기며 여생을 보내려 한다. 그 미래의 삶의 단서 하나를, 이곳에서 얻는다.


노후의 삶을 다룬 다큐에서 본 적 있다. 유럽과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코하우징(co-housing)이나 셰어드 하우징(shared housing) 같은 공동체 주거 방식이 발달했다. 각자의 방을 갖고, 부엌과 거실, 욕실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형태. 자유는 유지하면서도, 외로움을 덜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문 하나만 열면 누군가와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큰 위안이 된다. 식사를 준비하며 나누는 짧은 대화도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지만, 필요할 땐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넬 수 있는 관계. 의무가 아닌 선택으로 이어지는 공동체.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을 넘어선 새로운 삶의 단위이다. 서로에게 기대지 않고, 간섭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함께 살아가는 삶. 그런 방식의 동거는 혼자 사는 이들에게 위로이자, 또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비엔나의 하숙집에서 나는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어 하면서도, 자기만의 삶을 놓치고 싶지 않아 한다. 그 두 가지를 함께 누릴 수 있는 가능성. 지금 이 조용한 동거에서 그 가능성을 바라본다.


한국에서도 점차 코하우징 방식의 실버타운이 확산되고 있다고 들었다. 노년 1인 가구가 급속히 늘고 있는 지금, 이러한 공동체형 주거는 더 이상 특별한 방식이 아닐지도 모른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8년 후, 나에게 맞는 코하우징 실버타운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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