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을 찾기까지의 일기. 태국(7) - 방콕
5/29 (목) 화창한 날씨.
간만에 화장을 하고 아침부터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숙소 밖으로 나왔다. 세 번에 촬영, 10분의 대기 만에 사진이 나왔다.
보정이 하나도 없는 증명사진을 받아 드는 건 오랜만이다. 까맣게 탄 얼굴에 레게 땋음 머리를 한 상태로 10년 간 사용할 여권을 만들러 가야 한다는 사실이 와중에도 약간 웃겼다.
사진을 찍고 나서 하릴없이 시내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치앙라이는 사원을 제외하면 딱히 할 게 없다. 이래서 사람들이 장시간을 머물지 않는 걸까? 괜히 쇼핑몰에 가 날생선이라고는 연어밖에 없는 태국의 초밥도 좀 사 먹어 주고 어슬렁어슬렁 전자제품 매장도 돌아다니며 어떻게든 시간을 때웠다.
이제 방콕으로 가는 버스를 탈 시간이다.
숙소에서 짐을 챙기고 앞뒤로 백팩을 멘 다음 오토바이 택시에 몸을 실었다. 저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어 걱정했는데, 다행히 오토바이에서 내린 후에 비가 내렸다.
방콕으로 떠나는 2층짜리 버스는 생각보다 아주 준수했다. 심지어 화장실도 있다. 침대 버스는 아니지만 거의 180도에 가깝게 각도 조절도 되고.. 10시간이 넘게 버스를 타는 건 처음이지만 어떻게든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주섬주섬 목베개를 꺼내 쓰고 양말을 신고 바람막이를 입고 발리에서 산 사롱을 무릎에 덮고 잘 준비를 했다.
원래 이 시간이라면 방콕 가는 버스가 아닌 터키로 가는 비행기에 탔을 시간인데... 스스로 자괴감이 들고 슬픔에 소라게처럼 몸이 구부정하게 말려들지만 그래도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건 없다.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고 있다며 스스로를 달랬다. 버스는 두 시간에 한번 정도 휴게소에 들르며 막힘없이 12시간을 달렸다.
6시간이 지나면서부터 엉덩이와 등이 배겼지만 생각보단 탈만 했다. 잠도 아주 잘 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버스가 방콕에 닿았다.
5/30 (금) 조금씩 비가 온다.
방콕은 엄청나게 도시구나!
치앙마이, 빠이와는 다른 엄청나게 많고 높은 빌딩의 숲. 수많은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홍수를 뚫고 챗 지피티가 예약해 준 카오산 로드 숙소에 도착했다.
여권을 잃어버린 충격에 숙소를 알아볼 기력도 없어 챗 지피티에게 한국 대사관 근처 숙소를 찾아달라고 했는데, 숙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 프로그램 자식이 대사관에서 한참 먼 카오산 로드로 숙소를 잡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택시비로 200바트를 지불하며 짜증이 확 났지만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예약한 나의 잘못도 있다는 생각으로 일단 군말 없이 체크인을 했다. (와중에 3박이나 예약했다!)
내가 배정받은 받은 엘리베이터 없는 4층짜리 숙소 꼭대기였다. 짐을 이고 지고 한참을 허덕허덕 올라갔다. 땀이 줄줄 나서 또 한 번 짜증이 났지만 방문을 여니 아무도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날 내 방엔 아무도 체크인하지 않았다. 6인실 여성 도미토리를 나 혼자 쓸 수 있다니! 아주 오래간만에 진정한 혼자가 됐다. 일단 대충 짐을 던져 넣고 다시 오토바이 택시에 몸을 싣고 한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한 시간의 대기 후에 1등으로 대사관에 입장했다. 수속 자체는 한 시간 만에 끝이 났지만 한국 연휴(대통령 투표)와 태국 연휴 이틀(태국 왕비 생일)이 겹쳐 평소 받을 수 있는 일정보다 약간 늦게 여권을 받아볼 수 있을 거라는 대답을 들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귀신같이 두 나라의 연휴가 한 번에 겹쳐버렸다. 태국에 좀 더 머무르라는 하늘의 계시일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다시 택시를 타고 (망할 챗 지피티!) 숙소로 복귀했다. 어쨌든 노력해서 바꿀 수 없는 건 빠르게 받아들이는 게 이득이다.
꿉꿉하고 추적추적한 날씨에 밖으로 나가는 게 귀찮아져 바로 샤워를 하고 침대에 쏙 들어가 딴짓을 하다 잠들었다. 방을 혼자 쓰니 신경 안 쓰고 킥킥 댈 수 있는 게 좀 좋았다.
5/31 (토) 습한 날씨의 연속
의욕이 없다. 약간 지쳤다. 예전 방콕 여행 왔을 때 가려다 못 갔던 룸피니 공원이나 가볼까? 하고 일단 숙소 밖으로 나와봤지만, 공원으로 가기 전 점심을 먹기 위해 들린 아이콘 시암에서 줄곧 핸드폰만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와 쉬었다. 지쳤을 땐 잠시 쉬어가는 게 최고다. 저녁도 먹지 않고 하루 종일 숙소에서 뒹굴거렸다.
6/1 (일) 덥고 습하지만 햇빛이 좋았다.
6월이다 젠장!!!
생일 있는 6월을 터키에서 보낼 줄 알았건만 벌써 태국에 머문 지 두 달이 다 되어간다.
그래도 어제 하루를 푹 쉬어서인지 훨씬 나아진 컨디션으로 가볍게 일어났다. 이상한 표정으로 합장을 하는 도날드 모형이 있는 카오산로드의 명물,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하나 먹어주고, 역시 저번 방콕 여행에서 가지 못했던 방콕 왕궁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카오산 로드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왕궁. 뻘뻘 땀을 흘리며 도착했더니 오늘은 태국 여왕의 생일 때문에 왕궁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나.. 이번 달은 좀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약간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다. 쨍쨍 내리쬐는 햇빛을 뚫고 다시 조금 더 길을 걸어 국립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박물관은 아주 좋았다. 불교의 나라답게 불교 유물로 가득 차 있는 게 완전 내 취향이다. 수도에 있는 박물관이라 그런지 역시 규모가 남다르다. 힘들면 잠깐 앉아 쉬어가며 열심히 구경했다.
박물관 근처 카오산로드 맛집으로 소문난 끈적 국수 집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아싸 오늘도 아무도 내가 쓰는 숙소방에 체크인하지 않았다. 3일이나 도미토리 방 하나를 전세내고 혼자 쓰다니.. 완전 럭키비키다!
6/2 (월) 흐리지만 비는 안 왔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숙소에 누가 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언제 들어온 거지? 다행히 오늘은 숙소를 옮기는 날이라 괜찮다.
아침부터 분주히 나갈 준비를 하고 1층에 짐을 맡기고 어제 못 본 왕궁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입장비가 무려 500바트. 태국에서 갔던 관광지 중에 가장 고가다.
하지만 왕궁은 그 금액을 낼 만한 가치가 있는 공간이다. 왕궁 안쪽에 자리한 사원도 국왕의 집무실도 둘러보고, 표값에 포함된 왕비의 의복 박물관과 왕궁 극장에서 진행하는 전통 연극까지 모두 챙겨봤다.
기대하지 않은 연극이 정말 멋졌다. 발리에서 금액을 따로 주고 보았던 연극보다 퀄리티가 좋았다. 만족하며 극장을 나와 바로 옆 100년의 역사가 있다는 조식 식당에서 브런치를 먹으러 갔다. 주문미스로 너무 비싼 샌드위치를 시켜 먹긴 했지만, 나름 좋았다. 공짜 차까지 나와서 간만에 느긋하게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챗 지피티가 잘못 잡아준 숙소를 드디어 옮겼다. 공항을 가기도 편하고, 대사관으로 가기도 편한 아속역 근처 번화가에 있는 호스텔이다.
화장실을 한층 올라가야 하는 게 조금 귀찮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딱! 정석의 호스텔이다. 가장 좋은 건 사물함이 침대 안에 있어 짐을 풀기가 쉽다는 거다. 거기다 길 하나만 건너면 바로 코리안 타운이 있다. 터키로 가기 전에 잔뜩 먹어두어야겠다. 간만에 풀충전된 한식 게이지에 아주 행복해졌다.
6/3 (화) 흐리고 비 약간.
룸피니 공원을 가려다 숙소 근처 다른 공원을 찾아왔다. 간만에 공원에 드러누워 책을 읽으려고 했더니 비가 온다.
불행의 연속일까? 감성일까? 아랑곳하지 않고 매미 허물이 붙어 있는 나무 옆에서 책을 봤다. 엉덩이가 조금 젖긴 했지만 괜찮다. 방콕은 더우니까.
6/4 (수) 날씨 기억 안 난다.
숙소를 코리안 타운 근처로 잡아버린 업보로 매일매일 사치를 하고 있다. 오늘은 제육볶음을 먹었다. 아무리 태국음식이 맛있다고 해도 한국사람에겐 역시 한국 음식이 필요하다.
밥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방콕 무료 전시를 보러 갔다. 현대 작가들의 작품으로 가득 찬 1층을 막 돌아보려던 찰나, 대사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권이 나왔다!
쿵쿵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부리나케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숙소를 들러 필요한 서류를 챙긴 다음 대사관으로 달려갔다.
여권이다!
파란색에 조그만 수첩만 한 이것이 대체 뭐라고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던지. 도장 하나 없이 새하얗고 빳빳한 여권을 받아 들고 아주 조심스럽게 가방에 집어넣은 후 지퍼를 잠궜다. 우리 두 번 다시 헤어지지 말자.
그나저나 한국의 빨리빨리 속도가 어찌나 대단한지. 대사관에 여권을 신청한 게 지난 금요일이고, 이번 주 한국 대선에 태국 휴무까지 있었는데 여권이 오늘 도착했다.
이주정도는 걸릴 수 있겠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간만에 느껴보는 한국의 처리 속도에 아주 마음이 다 시원하다.
여권을 받자마자 거의 동시에 터키 이스탄불행 비행기 결제를 시도했다. 계속되는 실패에 머리를 쥐어뜯다 (항공 사이트 키패드가 안 먹힘, 유니온 페이는 안된다고 함, 한국번호로 문자 인증 하라고 함…)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 SOS를 쳐 겨우 구매에 성공했다. 내 생일 다음날인 6/8, 드디어 터키로 떠난다!
6/5 (목) 날씨 모름
마음이 편안해진 김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숙소에 처박혀 맥주와 불닭 볶음면을 먹으며 밀린 웹소설을 읽었다. 행복했다.
6/6 (금) 덥고 습하다.
새로운 대륙으로 떠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쇼핑몰로 가 잔뜩 깨진 핸드폰 보호필름을 바꾸고, 데카트론에서 수영할 때 입을 비키니를 샀다. 원피스형 수영복을 가지고 나왔는데, 화장실을 갈 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평소엔 남사스러워서 입지 못했던 비키니도 왠지 아시아 밖에선 입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길 것 같다. 대형 쇼핑몰에 온 김에 간만에 영화도 한편 봤다. 마블 영화 선터볼츠. 영화 듣기 평가를 하는 기분이었지만 나름 재밌게 봤다.
태국 영화관에선 영화가 시작하기 전 국왕에 대한 영상이 나온다. 내용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영상이 나오자마자 태국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니 우리나라 국기 게양과 비슷한 느낌인 듯하다. 이럴 때마다 우리나라와 정말 다른 나라라는 게 실감이 난다.
6/7 (토) 습하고 약간 비.
잠시 후 나는 6/8 새벽 2시 55분이면 나는 터키로 떠나는 비행기에 오를 예정이다. 그리고 오늘은 이국땅에서 나 홀로 맞이하는 생일이다. 아무도 없으니 혼자 생일을 축하하기로 했다.
가고 싶었던 방콕 현대 미술관 <모카 방콕>에 방문했다. 작품 배치도 그렇고, 다양한 전시 주제와 수많은 작품수에 4시간도 넘게 이곳에 머물렀다.(5층 규모)
시간이 더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울 정도! 몇몇 작가들의 정보를 찾아 인스타그램까지 추가했다. 이렇게 멋진 작가들을 많이 알게 되다니 기분이 좋았다. 기념품도 거의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수준이라 여행 기념품을 사가기에도 아도 적당할 것 같았다.
오후 내내 박물관에 머물고, 먹고 싶었던 일식 라멘을 먹기 위해 아속역으로 돌아왔다. 라면은 생각보다 비쌌지만,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맥주까지 시켜 야무지게 먹었다. 오늘 안에 찾아야 돼서 기본요금의 2배인 400바트를 내고 맡긴 빨래도 찾았다. 따끈따끈한 데다 다림질도 되어있다. 태국의 이 세탁 시스템 정말 그리울 거야! 또다시 혼자 이런저런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와 지하철로 공항까지 이동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지역. 터키 이스탄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