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자가 여권을 잃어버렸을 때

EP 12. 그래도 내일의 태양은 뜬다. 태국(6) - 치앙라이

by 모두의 신대리

여권이 없습니다.


정든 빠이와 사람들과 헤어져 치앙마이에서 하루를 보내고, 가장 기대했던 사원 중 하나인 화이트 템플을 보기 위해 치앙라이로 넘어간 날. 새로운 숙소에 체크인을 하기 위해 여권을 찾던 도중 내 가방 어디에도 나의 여권 지갑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X 됐다!


마음속에서 삐용삐용 위험알람이 울리지만 애써 무시하며 스스로를 달랬습니다. 일단은 상황을 파악하는 게 우선입니다. 급한 대로 여권사본으로 숙소 체크인을 마치고 호스텔 공용공간 소파에서 앞 뒤 모든 가방을 뒤집어엎어봤지만 여권이 없는 게 확실합니다.


나는 치앙라이에서 3일을 보내고, 치앙라이 국제공항에서 터키로 떠날 예정이었습니다. 심장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아련함을 가지고 탄 치앙라이로 떠나는 버스. 대략 네시간 후 이렇게 슬퍼질줄 몰랐다.



긴장 때문인지 불안 때문인지 물속에 있는 듯 흐느적거리는 손으로 부킹닷컴을 검색해 전 숙소에 여권이 있는지 확인해 줄 수 있는지 문의했습니다. 어젯밤 치앙마이 숙소에서 체크인을 했으니 그 숙소에 여권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입니다. (나오기 전 사물함과 침대를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애써 모른 척합니다)


여권이 없는 것 같지만 CCTV를 한번 확인해 주겠다는 친절한 직원의 답변을 받고, 숙소 5분 거리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 분실물이 들어온 건 없는지 문의했습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은 약간의 대기 이후 이곳저곳으로 전화를 돌려 봤지만 숙소에도, 버스에도, 버스정류장 어디에도 분실물은 없다는 천청벽력 같은 대답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치앙마이 숙소에서 씨씨티비 상 내가 여권 지갑을 가방에 넣는 걸 확인했다는 메시지까지 받고 나니 여권을 잃어버렸다는 게 확실해졌습니다.


나는 세계여행을 시작한 지 70일. 방문한 두 번째 나라만에 나의 유일한 국제 신분증. 여권을 잃어버린 잃어버린 세계 여행자가 된 것입니다.


사실 여권만 잃어버린 게 아닙니다. 여권 지갑에 넣어둔 현금 600달러와 황열병 증명서, 한국에서 쓰던 신용카드 두장과 트래블 페이 카드 한 장, 예비용 증명사진까지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쿠궁 심장이 빠르게 뛰더니 이제는 오히려 더 느리게 뛰는 기분이 듭니다. 나의 인생 중 가장 막막한 순간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황하고 슬퍼한다고 해서 이 상황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나뿐입니다.


일단 미리 예약한 터키 숙소를 취소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운 좋게 딱 오늘까지 취소 보장 기간이라 무료 취소가 가능했습니다. 처음 가는 유럽 (정확히 유럽은 아니지만) 나라에서의 새로운 경험을 꿈꾸며 예약한 숙소인데 클릭 한 번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다니.. 슬픈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일단 더 이상의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다음은 샤워입니다.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서 주워듣고 조금이라도 기분을 환기하고 싶을 때마다 하는 습관 중 하나입니다.


넋 놓고 옷가지를 다 벗고다니 뒤늦게 수건도, 샤워타월도 없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래도 일단 냅다 씻어봅니다. 씻는건지 마는건지 설렁설렁 비누를 묻혀 닦고, 축축하게 젖은 몸에 잠옷을 끼워 입고 물이 줄줄 흐르는 채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래도 아까보단 약간 마음이 나아진것 도 같습니다.


화장실 밖으로 나와 제대로 말리지 않은 머리에서 물이 뚝뚝 흐르는 걸 그대로 내버려 두고 아이패드를 켜고 여권을 잃어버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검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유튜브, 네이버, 구글.. 이곳저곳을 돌며 여권을 분실한 사람들의 후기를 듣습니다. 그나마 내가 있는 태국은 동남아라 한국과 가까워 비교적 처리가 어렵지 않다는 답변을 보고 약간의 위안을 받았습니다.


여행이 진행될수록 그나마 태국에서 잃어버린게 천만 다행이라는게 확실해졌다.


약간의 검색을 통해 알게 된 나의 다음 할 일은 지역 경찰서로가 분실 증명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곤 방콕에 있는 한국 대사관으로 이동해 여권이나 긴급 여권을 재발급받고, 대사관이 증명하는 여권 분실서를 발급받으면 해외로 출국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치앙라이에서 방콕까지는 비행기로 한 시간, 버스로 13시간 거리. 여권이 없는 나는 비행기를 탈 수 없으니 빼도 박도 못하게 13시간의 버스 여행이 당첨입니다!


시작하지도 않은 여정에 약간 지친 기분을 느끼며 하루 만에 발급이 가능한 긴급여권을 받고 한국으로 일단 돌아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한번 돌아가면 다시는 한국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 같아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미련을 가지고 취소하지 못했던 비행기표를 마저 취소하고 (수수료만 환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방콕에 가는 버스표를 어디서 사야 하는 지를 확인하고 남은 일은 내일의 내가 모두 해치우는 것으로 하고 지친 나를 달래주기 위해 일단 침대에 누웠습니다.


5시간의 버스를 탔을 때 보다 배멀미로 한참을 고생했을 때보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40분 넘게 걸었을 때보다도 훨씬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한동안을 감은 눈으로 이리저리 뒤척거리다 어느새 선잠이 들었습니다.


평소와 달리 조금의 지체도 없이 번쩍 일어나 옷을 입고 어제 검색해 놨던 치앙라이 경찰서로 가 분실 신고서를 발급받았습니다. 한국에서도 몇 번 가보지 않았던 경찰서를 해외에서 가보다니. 여행 덕분에 해보는 또 다른 새로운 경험입니다.

친절한 경찰분들 덕분에 수월하게 발급 받은 분실 증명서.


종이 한 장을 소중하게 가방에 우겨 놓고 여권을 만들기 위한 증명사진을 한 장 찍은 후 본격적인 치앙라이 관광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태국 여행을 준비할 때부터 가장 가고 싶었던 렁쿤 사원, 일명 화이트 템플로 향했습니다.


모든 곳의 흰색과 은색! 아름다운 왓렁쿤.



태국의 건축가이자 화가인 찰럼차이가 철없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반성하며 수행의 일환으로 자신의 사비 약 4천만 바트 (대략 13억 3천만원)를 들여지었다는 왓렁쿤.


부처님의 지혜를 뜻하는 흰색으로 지옥과 현세, 극락을 표현한 이 작은 사원은 멀리서부터 압도되는 건축미와 성스러움에 나의 작은 (사실 나에겐 작지 않은) 고민들을 살짝은 잊게 해주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마음이 아무리 슬퍼도 이곳은 너무나 멋집니다. 어려움이 생겨도 힘든 일이 나의 경로에 끼어들어도 시간은 또 흐르고 좋은 곳은 좋고 맛있는 음식은 또 맛있습니다.

자책으로 이 여행을 망치기에 내가 있는 이곳 치앙라이는 또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괜히 더 맛있는 음식을 사먹었다. 수박주스는 정말 맛있었다.



나는 50바트짜리 수박주스를 한잔 사들고 여권의 걱정은 또다시 내일의 나에게 미룬 채, 비가 오는 치앙라이의 흰색 사원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습니다.



치앙라이의 컬러 템플 중 하나인 블루 템플. 입장비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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