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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적당한 때

오늘 저녁메뉴는 죽음입니다

  어느 드라마에서 배우들이 얘기한다. 사람이 죽기 적당한 때는 언제일까. 80정도?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노인들 보면 저렇게 오래 살면 안 된다고 하다가 본인이 80이 되자 다섯 살씩 늘어나서 90이 됐고 그때도 죽기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했다.


  미래에 시스템이 생겨서 사람들이 모두 100살까지 살고 같이 사라지면 어떨까. 그래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그러자 한명은 99살에 반란을 일으킨다고 하고, 다른 친구는 산으로 도망가겠다고 한다.

  결국 죽기에 적당한 때는 없나보다. 항상 무엇엔가 미련이 남고 후회가 남는다. 미련 없이 죽음이 언제 오든 잘 받아들이자고 죽음학 공부를 하고, 죽자고 살지만 결국 죽기에 좋은 때란 없는 거다.     


  그래도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예고 없이 죽음은 찾아온다. <내가 함께 있을게>라는 동화책에는 오리를 따라다니는 죽음이 나온다. 오리는 죽음과 친구가 된다. 오리가 쓸
 쓸 하지 않게 마지막을 떠날 수 있게 죽음이 지켜주고 보내준다. 우리도 죽음과 친구가 되어볼까. 친구야. 나에게 오기 전에 한 달이라도 미리 연락 해주면 안 되겠니? 예고 없이 죽음을 맞는 사고가 많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암이 행운이라고도 한다. 몇 년 혹은 몇 달이라도 죽음을 예상하고 준비할 수 있다고 말이다. 환자한테는 잔인한 일이겠지만 오죽하면 그런 말이 나왔을지 답답하기만 하다.     

지난 2년 동안 코로나로 혹은 코로나 백신 후유증으로도 어이없는 죽음을 많이 겪었다. 죽음이란 것이 아주 멀리 있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팬데믹으로 그 환상이 깨져버렸다.      


그렇다고 죽음이 오지 않는다면 우리 삶의 가치가 지금보다 가벼울지도 모르겠다. 끝이 없으면, 인생이 유항하지 않다면 이렇게 매일 아등바등 고민하며 살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하고 싶은 일 나중에도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허나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해야한다. 내일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오늘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일단 햇살이 찬란한 밖으로 나가자. 어릴 때처럼 집 잎에서 소리치고 싶다

”친구야~~ 노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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