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열다
3년 전 스쿠버 다이빙 교육을 위해 태국으로 갔다.
태국도 처음이었고 다이빙도 처음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하고자 마음먹은 일은 어떤 것이든 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혈기 넘치는 20대 중반이었다. 처음 도전하는 일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정상을 정복하는 기분으로 여권의 도장을 늘려갔다. 때가 되면 어디든 나가서 뭐라도 해봐야 하는 방랑벽이 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때의 기억과 기분을 복기해본다.
어느 겨울, 바다가 보고 싶어 마음 맞는 친구들과 차를 몰고 달려간 속초에서 난데없이 설움과 불안이 복받쳐올라 혼자 해변으로 뛰쳐나와 해변을 달렸다. 파도는 제 앞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다. 빗방울이 흩날리기 시작한 해변을 미친 사람처럼 내달리면서 목이 나가도록 있는 힘껏 악을 써봐도 겨울 바다와 매서운 바람이 합심해서 내리치는 육중한 장단에 한점도 빠짐없이 잡아먹혔다. 당연하지만 파도는 내 악다구니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제멋대로 모습을 달리하며, 비선형의 리듬으로 해변을 때리고 물러서길 반복할 뿐이었다.
친구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돌아와 좀 전의 뜀박질로 쉬이 가라앉질 않는 가슴을 부여잡고 말했다.
"나, 일 년 뒤에 다이빙하러 갈 거야."
그렇게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떠나기 전 여행 계획을 세우고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즐기는 편이다. 여행자 커뮤니티에서 지역과 다이빙 스쿨의 정보를 얻고 이동 경로를 확인해보았다.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러던 중 발견한 태국 꼬따오는 '스쿠버 다이버의 섬'이라는 타이틀로 마음을 사로잡았다.
꼬따오는 태국 남부 타이 만에 속해있는 작은 섬이다. 태국의 관문인 방콕에서 버스로 8시간. 국내선 비행기로 경유해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여행은 길 위에서 고생을 하는 것이라는 일종의 로망이자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주저 없이 8시간의 버스행을 택했다.
그로부터 딱 1년이 지난 2017년 2월. 방콕행 에어아시아에 탑승했다.
이륙하기 전에 잠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기체가 활주로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전자동 시트를 뒤로 한껏 젖혔더니 완전히 누울 수 있었다. 몸이 편해지니 의식이 멀어진다. 눈을 떴을 땐 창 밖으로 땅이 멀어지고 있었다. 다시 눈이 감겼다. 시간의 흐름을 잘 느낄 수 없는 비행기 안에선 기내식을 준비해 온 승무원의 인기척으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잠이 들고 얼마간 지났나 보다. 얇은 알루미늄 팩에 담긴 뜨거운 식사를 받아 드니 강황으로 노랗게 익은 인디카 쌀밥과 구운 닭고기 네 점이 가지런하게 놓여있었다. 작은 통에 액젓을 닮은 소스가 곁들여 있어 조금 찍어서 맛을 보니 낯선 냄새가 혀 끝에 물씬 퍼진다. 확실한 초록색 향기다. 고수와의 첫 만남이었다.
입국 심사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입국장을 가득 메운 온갖 국적의 사람들이 뭉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말과 눈동자들이 우글거린다.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와 티셔츠 아래 언뜻 보이는 타투, 묶어 올린 드레드 머리, 색 바랜 배낭을 멘 전형적인 유럽 배낭 여행자가 있는가 하면 선글라스를 올려 쓰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 쓴 깔끔한 동아시아 관광객들 사이로 태국인 인부가 공사 장비를 밀고 지나간다.
견디지 못할 정도로 더운 건 아니지만 인구 밀도가 높아질수록 숨 쉬기가 버겁다. 기내에서 준 작은 생수 두 병을 두고 내린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목이 마르고 활자에 집중하기엔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좀처럼 줄지 않는 대기열을 애써 잊어보려 가방에서 작은 책을 꺼내 들었다.
카오산 로드에서 출발하는 롬프라야 버스 시간까지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혼자 온 여행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내 앞에 있던 한국인 부부와 잠시 말을 나눴다. 그들은 패키지여행으로 왔고, 여기서 나가면 가이드를 만나 바로 파타야로 간다고 했다. 무덥고 낯선 언어의 공기 속에서 중년 부부는 나만큼이나 초조해 보였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입국심사장의 긴 줄을 거쳐 공항 밖으로 나오니 키 큰 야자나무 가로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발을 딛고 서있는 곳이 낯선 땅임을 인지하는 순간은 비행기에서 내려서 입국 게이트로 걸어갈 때가 아니다. 공기의 냄새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그리고 낯선 형태의 가로수를 보게 될 때다. 비장하게 리무진 버스에 올라탔다. 석양은 벌써 자몽 속살과 같은 색으로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버스 회사는 여행자들의 거리로 유명한 카오산 로드 인근에 있었다. 세계의 모든 음식이 모인 듯 온갖 것을 다 파는 음식점들, 술집, 노천 마사지샵, 잡다한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로 한밤중임에도 대낮같이 밝았다. 음식들처럼 온갖 나라에서 모인 여행자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열대의 밤을 즐긴다. 나 역시 그 번화함에 눈이 사로잡혔지만 버스 체크인이 먼저였다. 지도를 보며 찾아간 롬프라야 사무실은 방콕에서 출발해 태국 곳곳의 관광지로 여행자들을 실어 나르는 출발지이자 꼬따오로 가는 첫 관문이었다.
좁고 어둑한 사무실에는 커다란 배낭을 진 여행자들이 가득했다. 미리 예약한 바우처를 내보이자 짐 표와 티켓을 내어줬다. 이때까지만 해도 짐 표를 단 이 가방이 정말로 큰 짐이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었다.
무사히 체크인을 마치고 출발 시간에 늦지 않게 60L짜리 가방을 손에서 놓고 나니 긴장도 한결 가벼워져서 허기를 채우러 발길을 옮겼다.
가장 먼저 팟타이 노점이 눈에 들어왔다. 재료를 한가득 쌓아놓고 볶아주는 팟타이는 30에서 50밧 사이. 한화로 2000원이 채 되지 않는다. 길거리 음식이니 테이블도 따로 없이 젓가락을 받아 들고 근처에 서서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웠다. 기대만큼 놀라운 맛은 아니었지만 허기를 달래기에는 충분했다. 거리를 둘러보면서 자른 망고도 한 컵 사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꼬따오로 가는 2층 버스에 올라탔다.
이곳 방콕에서 출발해 남쪽의 춤폰으로 가서 배를 타고 꼬따오로 들어갈 것이다. 장장 10시간이 넘는 대이동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