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캠퍼밴 여행기
간밤에는 몇 번인가 잠을 깬 것 같다. 제대로 일어난 건 아침 7시 무렵이었다. 남편은 먼저 일어나서 캠퍼밴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나는 ‘5분만 더’를 중얼거리다가 마지못해 일어났다. 양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마치자마자 캠브릿지 홀리데이파크를 나섰다.
호비튼으로 가는 길엔 아침 안개가 낮게 깔려 벌써부터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이십여분 정도를 달려서 호비튼 세트장 입구에 도착했다. 예약 확인을 하고, 투어 출발까지 남은 시간에 카페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나눠먹고 투어 버스에 올라탔다. 호비튼은 실제로 반지의 제왕 촬영지는 아니지만 매번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북섬의 대표 관광지가 되었다. 농장 입구에 들어서며 남자 가이드가 던지는 농담에 나도 웃고 싶었지만 농담을 하는 중이라는 것만 어렴풋한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이중으로 쳐진 입구 게이트를 지나고, 풀을 뜯는 양 떼들도 지나고, 버스에서 내리니 여과 없는 햇살과 함께 호빗 마을 샤이어의 모습이 드러났다. 남편과 나는 서로 번갈아 사진을 찍어주며 영화 속의 풍경으로 발을 내디뎠다.
한 시간 남짓한 투어가 끝나고 그린드래곤 여관에서 약한 도수의 알콜 음료를 받아 들었는데, 쨍한 햇살을 받으며 서서히 취기가 오르는 게 적잖이 기분을 끌어올렸다. 비록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평화라고 해도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않은가.
호비튼에서 로토루아로
대형마트 카운트다운에 주차를 해놓고 점심을 먹기 위해 로토루아 중심 시내에 들어섰는데, 길거리 풍경은 미국과 비슷하면서 1층 상점가가 늘어서있는 모습은 동남아 어딘가의 길거리와 분위기가 비슷했다. 우리는 멕시칸 요리집에서 타코와 부리또를 나눠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홀에서 서브하는 남자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기에 잠시 대화를 나눴다.
"너희들 어디서 왔어?"
"한국에서 왔어."
"와! 나도 한국에 꼭 가보고 싶어. BTS랑 케이팝을 좋아하거든."
그의 말이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립서비스든 아니든 머나먼 뉴질랜드에서 케이팝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점심을 먹고 카운트다운에서 저녁거리와 필요한 것들을 사고 가까운 거리의 지열지대 관광지 테 후이아로 향했다. 테 후이아는 가이드 투어로만 진행하는데 오늘은 예약이 모두 찼다고 한다. 플랜 B로 레드우드 숲에서 나무 사이를 걸을 수 있는 곳이 있다기에 그곳으로 갔다. 계획 없는 여행의 장점. 어디든 마음 내키는 대로 갈 수 있다. 레드우드 트리워크에 관광객은 많지 않았고, 울창한 레드우드 삼나무 숲 사이를 유유히 거니는 경험은 역시나 특별했다.
30분 남짓 트리워크를 마치고 내려와 숲을 조금 더 걸었다. 그래도 오늘의 홀리데이파크 체크인까지 시간이 많이 남기에 폴리네시안 스파도 가보기로 했다.
폴리네시안 스파의 거대한 규모와 유명세와는 다르게 온천탕에 가득한 각질에 남편과 나는 식겁하고 말았다. 때를 미는 문화는 아마 한국뿐이던가. 몸을 씻고 탕에 들어가는 목욕 문화도 한국과 일본 정도뿐일 테니 서양인들 관점에서는 이상할 게 없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각질탕에서 짜게 식고 그나마 사정이 나은 다른 탕에 몇 번인가 몸을 담그고 쉬다가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들어서자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오늘의 캠프 사이트는 블루 레이크 탑텐 홀리데이파크. 캠핑장 바로 앞에 블루 레이크라는 이름답게 정말이지 시리도록 파랗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유료 홀리데이파크답게 깨끗한 키친에는 별다른 조리도구가 없어서 남편은 캠퍼밴 안에서 소고기를 굽고 나는 야채를 데쳐서 구운 고기와 함께 먹었다. 소금과 후추만 쳐도 재료 본연의 맛이 생생히 느껴져 심심하지 않다. 해가 넘어가고 어둠이 찾아올 무렵 마시는 맥주 한 캔의 여유와 낭만. 뉴질랜드의 서늘한 밤공기를 안주 삼으니 취하지도 않고 맥주가 술술 넘어간다. 이곳에 오기를 정말 잘했다고, 든든한 반려자와 함께라서 더 행복한 시간에 감사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