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캠퍼밴 여행기
선잠에서 깨어나니 남태평양의 한가운데를 날아가고 있다. 집에서 나온 지 13시간째, 기내 스크린에 표시되는 남은 비행시간은 시간은 세 시간. 비행은 언제나 현실감이 없다. 너무 높은 곳에서 너무나 빠른 속도로 날아가기 때문에. 여객기 안은 마치 진공포장 되어 진열된 상품처럼 균일하고 지루하다. 옆좌석에 앉은 남편은 일찌감치 곯아떨어졌다. 언제 어디에서나 머리 붙이고 잘 수 있다는 건 일종의 재능 같다.
이코노미 좌석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기 수십 번. 드디어 오클랜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코로나 시국에 결혼한 우리는 드디어 약 3년 만에 신혼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설렘과 기대가 교차하는 것도 잠시, 오늘 순차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모든 일이 차질 없이 이뤄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오늘의 목적지인 홀리데이파크의 체크인 시간 안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마치고 도착해야 하는 미션이 시작되었다. 긴 세관검사 줄을 빠져나오니 공항 바깥에서는 화창하고 맑은 햇살이 반겨준다. 우버 택시를 불러 3주 동안 우리의 집과 발이 되어줄 캠퍼밴을 인수하기 위해 이동했다.
예약을 확인하고, 차량 안내에 대한 동영상을 시청하고, 직접 차에 올라타 이것저것 만져본다. 도요타 하이에이스를 개조한 트래블러스 아우토반의 쿠거 캠퍼밴. 생각했던 것보다는 아담하고 귀여운 크기였지만 둘이서 다니기에는 딱 알맞아 보였다. 캠퍼밴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앞에 싱크대와 수전, 가스레인지와 전자레인지가 있고 싱크대 아래 선반에는 냄비와 조리도구 일체가 포함되어 있다. 원래는 좌석이 있었을 차량 뒤쪽으로는 소파 혹은 침대로 쓸 수 있는 공간과 테이블이 설치되어 아늑해보였다.
약간 무뚝뚝해 보이는,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사항에 대해서는 세심하게 짚어주는 남자직원이 캠퍼밴 전반에 대한 안내를 해줬고 곧이어 차 키를 넘겨받았다. 남편은 긴장한 기색도 전혀 없이 높은 하이탑 캠퍼밴의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오늘의 첫 번째 경유지, 15km 정도 떨어져 있는 한인마트를 향해 출발했다.
내비게이션이 엉뚱한 길을 알려준 탓에 조금 헤맨 뒤에 한인마트에 도착했다. 나는 20대 중반만 하더라도 현지식을 고수했지만, 이제는 익숙한 맛이 곧 정신적 동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고추장, 라면, 햇반, 각종 조미료 등 캠퍼밴 요리에 필요한 필수 품목들을 장바구니에 채워 넣었다. 최대한 빠르게 장을 보고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 해밀톤 인근의 캠브릿지 홀리데이파크로 향했다.
오클랜드에서 멀어질수록 차가 눈에 띄게 줄어들더니 어느 순간 정체현상이 사라졌다. 가도 가도 1번 고속도로 양 옆에는 들판과 풀을 뜯는 소떼, 목가적인 풍경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하늘은 탁 트여있고 뭉게구름이 지평선에 가득 걸린 가운데 서울의 뿌연 미세먼지가 낮에 꾼 꿈처럼 아득히 멀게 느껴진다. 깨끗한 시야에 우리 둘은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며 한 시간 반을 달렸다.
홀리데이파크의 체크인 마감 시간은 오후 7시, 아직 햇빛이 서쪽으로 사라지지 않았지만 없는 여유를 끌어모아 미소를 띠며 체크인 수속을 마쳤다. 오늘밤 잠자리가 되어줄 캠프 사이트를 배정받고 저녁거리를 사러 근처의 마트로 다시 캠퍼밴을 몰고 나갔다. 양고기, 맥주, 샐러드, 내일 아침거리로 먹을 베이글을 사고 술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보드카도 한 병 샀다. 홀리데이파크로 돌아와 짐을 풀고 샤워를 마치니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청량함이 시원한 바람과 함께 찾아들었다. 떡진 머리 안녕, 기름진 얼굴도 안녕. 긴 이동 끝의 뜨거운 샤워는 한줄기 축복과도 같다.
우리는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양고기를 구워 먹으며 집에서 약 9,600km 떨어진 머나먼 남쪽 섬나라에 무사히 도착했음을 자축하며 건배했다. 내일은 북섬의 대표 관광지 호비튼을 둘러보고 그 뒤로는 정해진 일정 없이 둘러보려고 한다. 부디 남은 20일도 무탈하기를 바라며.
남편은 밤하늘에 뜬 오리온자리의 벨트를 다시 한번 손으로 짚어 가르쳐줬다. 보름달이 가로등처럼 밝은데도 오리온자리는 선명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뉴질랜드에서의 첫날밤이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