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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현경 Jun 11. 2020

커리 세트와 짜이

나고야에서 뭐 먹었어?

총천연색 현란한 인도 포스터와 노란빛 조명이 로컬 식당의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꿀에 절인 생강이 절실하다. 하루 종일 배관과 씨름하고 나니 집에 돌아가서 저녁 해 먹을 기운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아 이사 온 날부터 눈여겨봐 둔 집 앞 인도 식당 앞에 자전거를 세웠다.

문을 열자마자 눈썹 사이에 빈디를 붙인 여주인과 눈이 마주쳐 영어를 써야 할지 3초간 고민하고 있는데 인도 억양의 일본어 인사가 먼저 들어온다. 손님은 나뿐이다.


메뉴를 받아 드니 먼저 세트 메뉴가 눈에 들어왔다. 신년회, 망년회, 마마회, 여자회... 이런저런 모임들. 일본의 식당에서 '여자회'라는 단어는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여성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는 그룹을 뜻하는 듯하다. 대체로 깔끔하고 조막만 한 접시에 가지런히 담긴 샐러드와 디저트가 포함되어있다.

허나 지금 나는 예쁜 상차림보다 함바집 식사가 필요하다. 많은 커리와 거대한 난을 원한다.

굉장히 다채로운 난 메뉴를 지나 단품을 조금 훑어보다가 커리 2종류에 샐러드, 음료가 포함된 세트로 정했다. 곧이어 컵에 담긴 치킨 수프와 샐러드가 나왔다.

한입 들이키니 아, 딱 삼계탕 느낌. 생 파슬리가 씹히면서 향이 진하게 올라온다. 샐러드의 야채도 아삭하고 신선하다. 시작이 좋군.


버터 치킨, 새우 커리, 갈릭 난. 샐러드와 수프 포함.


난과 커리가 조막만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거대한 스테인리스 쟁반의 등장과 동시에 증발했다.

이렇게 큰 난을 전에 본 적이 있던가? 어딜 가도 무난하게 고를 수 있는 버터 치킨과 새우 커리가 그릇에 넘칠 듯 가득 담겨있지만, 이건 확실히 커리가 남을 모양새다.

따끈한 난을 찢어서 커리에 담갔다. 한입.


매움 정도를 보통으로 했더니 역시 달다. 마음이 안정되는 맛. 그리고 닭고기의 식감은 놀랍도록 찰지다. 새우는 말할 것도 없고. 손이 알아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거대한 난은 금세 작아졌고 다시 고민의 시간이 왔다. 이미 양은 적당히 찼지만, 이대로는 커리가 남아버린다.


"스미마셍"


TV 야구 중계를 넋 놓고 보고 있던 주방 오라버니가 5초쯤 지나 퍼뜩 내 쪽을 보고 다가온다.


"밥 조금만 주시겠어요?"


"ㅇㅇ 오카와리?"


"ㅇㅇ"


잠시 뒤 작은 밥공기를 뒤집은 모양의 귀엽고 노란 강황 밥이 도착했고 나는 숨을 한번 가다듬은 뒤, 이번엔 수저를 들었다. 고독한 미식가 이노가시라 고로도 분명 이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맛있는 식사가 끝나갈 무렵 인간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남길 것인가. 조금 더 채워 넣을 것인가.


오늘 아침도 혼신을 다해 도시락을 만들면서 생각했다. 식사는 하루의 시간을 아는 기준점이다. 확실히 요즘 나는 그 기점을 위해 살고 있다. 아침을 필사적으로 챙겨 먹는 것은 점심까지 버틸 연료가 바닥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오전엔 점심을 맛있게 먹기 위해 전력을 다하며, 퇴근이 가까워지면 오늘 저녁은 뭘 먹을지 나열해본다.

이전에는 이 정도로 완벽하게 규격화된 생활을 해 본 적이 없었고, 이 정도로 매 끼니에 감격했던 적도 없다. 그야말로 '먹고 일하고 먹고 일하고 먹고 잔다'로 요약할 수 있는 삶.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는 루틴 한 삶에 막연한 공포와 혐오감을 느꼈던 게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닌데, 그렇게 살면 아무 생각도 못하고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완벽한 오산이었다. 밤낮이 바뀐 채 살던 때의 머릿속이 훨씬 탁했다. 정오가 지나서 눈을 떴을 때의 그 패배감은 다시 겪고 싶지 않다.



커리2, 난1, 밥1을 남김없이 해치우고 나니 잔에 넘칠 듯 찰랑거리는 짜이를 받았다. 조금도 달지 않다. 설탕 한 스틱을 넣어도 달지 않다. 강한 향신료 향이 코를 자극하는, 언스위티드 짜이를 조금씩 홀짝였다. 생강차를 마시는 것과 흡사했다. 단 음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원래는 달지 않을 때(ex. 티라미수) 은근히 문화 충격을 받곤 한다. 단것의 위상이 드높은 일본은 그만큼 단맛의 층위가 복잡하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달기만 한 건 안 먹어요.' 같은 느낌. 정도를 지키는 달콤함은 무작정 엄청나게 단 것 보다 매력적이다.


짜이를 받아 들고 잠시 단것에 대한 생각에 빠져있다가 멀리서 들리는 인도 음악과 야구 중계가 뒤섞인 소리가 귀에 들리면서 현실로 돌아왔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식당이 인도 커리라니 운도 좋지.


부디 지친 날에는 때때로 버터 치킨을.


ディープ・ジョティ 笠寺 DEEP JYOTI 카사데라

https://goo.gl/maps/KGTTNjiZc3xpGXV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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