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이다. 내가 묵고 있는 청킹맨션 1층 상점가는 인도인들과 흑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범죄인들은 깨끗이 정리됐으니까 안심하고 지내라던 호객꾼의 말은 아마도 사실이겠지만, 기분 탓인지 곳곳에서 느와르 분위기가 느껴졌다. 러닝셔츠만 입은 배불뚝이 남자들이 신문을 뒤적거리면서 혼자 아침밥을 먹고 있는 풍경부터가 보통의 여행지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상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남자인 것도 이 삭막한 분위기에 한몫을 하고 있는 듯싶었다.
청킹맨션 1층 상점가를 빠져나오자 네이션 로드가 나타났다. 네이션 로드는 홍콩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중 하나인데, 의외로 인도가 좁아서 사람이 더 많게 느껴졌다. 걸음을 멈췄다가는 압사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와중에 누군가가 은근슬쩍 다가와 ‘롤렉스 카피(copy)’라고 하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90년대까지만 해도 홍콩은 세계의 시계 공장(물론 가짜 시계)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규모가 거대한 짭 시계 공급지였다. 그중에서도 짭 롤렉스는 단연 최고 인기 상품이었는데, 나 같은 여행자( 반바지에 목 늘어난 티셔츠를 입은)까지 찔러보는 걸 보면 짭 롤렉스의 인기는 아직도 여전한가 보다.
네이션 로드를 따라 해안가로 걸어 나오자 침사추이의 랜드마크인 시계탑이 보였다. 1915년에 세워진 이 시계탑은 원래는 홍콩과 중국을 연결하던 철도의 종착역이었던 '까오롱역'의 일부였는데 역은 1970년대에 없어졌고, 지금은 이 시계탑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까오롱역은 홍콩 현대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역이었다. 1970년대에 역이 없어지기까지 까오룽 역은 홍콩 드림을 꿈꾸며 중국에서 넘어오는 이주민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곳이다.
홍콩 영화 <첨밀밀>의 두 주인공 장만옥과 여명도 그런 이주민들 중 하나였다. 나는 1997년에 중량 시장 근처에 있던 영화관(영화관 이름을 잊어버렸다)에서 <첨밀밀>을 봤다. 아주 오래된 영화지만 지금도 장만옥이 커다란 캐리어를 질질 끌며 기차역에 내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시계탑에서 조금 더 걸어가자 스타의 거리가 나타났다. 바닥에는 홍콩을 대표하는 영화배우들의 핸드 프린팅이 새겨져 있었다. 주성치, 왕조위, 장만옥, 유덕화, 성룡, 장국영.... 등의 핸드 프린팅을 볼 수 있었는데, 장국영 자리에는 별이 새겨져 있었다. 하나투어 깃발을 따라다니는 단체 관광객들은 스타의 거리 한가운데쯤에 있는 이소룡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단체관광객들이 다 지나간 다음에 가까이 가서 보니 발가락을 건들면 입에서 "야뵤오~~~" 소리는 들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교한 동상이었다.
스타의 거리를 구경하고 다시 시계탑을 지나 캔톤로드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캔톤로드는 영화 <첨밀밀>에서 여명과 장만옥이 낡은 자전거를 타고 누비던 바로 그 거리다.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서 홍콩으로 이주해 온 두 남녀는 비록 가난하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간다. 영화는 그렇게 둘의 사랑이 화선지에 쏟아진 먹물처럼 조용히 번져나가는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둘 사이에는 묘한 거리감이 생긴다. 원래 시간이 지나면 모든 관계는 변하게 마련이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렇게 변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친구도, 사랑도, 심지어 부모와의 관계도 시간이 흐르면 달라진다. 관계라는 틀은 계속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은 달라진다. 억지로 관계를 이어갈 순 있지만, 억지로 똑같은 감정을 이어갈 순 없는 법이니까.
반면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 가슴 한편에서 떨궈 낼 수 없는 감정도 존재한다. 인생의 어느 갈림길에서 각각 다른 길을 걸어가고, 오랫동안 소식이 끊기고,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어도, 지워 버릴 수 없는 감정이란 게 있다. 나이가 들어도 그 감정만은 늙지 않고, 그냥 그대로 마음 어느 한 구석에 늘 존재하고 있다. 영화 <첨밀밀>은 변하지 않는 이런 감정과 시간이 흐르면서 변할 수밖에 없는 감정. 이 두 감정의 공존을 섬세하고 따뜻하게 표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흐르고 각각의 처지가 바뀌면서 생기를 잃어가던 <첨밀밀> 속 주인공들의 사랑처럼 캔톤로드도 이제 영화 속 그 거리가 아니다. 거리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다. 영화 속 소박해 보이던 그 거리는 명품 매장들로 가득 차 있었다. 캔톤 로드 입구에 있는 홍콩 최대의 쇼핑몰인 하버시티는 그냥 지나치면서 구경만 해도 발이 아플 정도로 넓었다.
캔톤로드에서 선착장으로 가는 길에 배가 고파서 맥도널드 가게에 들어가 햄버거를 시켰다. 그러고 보니 장만옥과 여명이 처음 만난 곳이 바로 캔톤로드에 위치해 있는 맥도널드였다.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이 맥도널드에서 만나, 12년 동안 이어진 그 둘의 인연은 그 후 어디로 흘러갔을까? 왠지 두 사람의 삶이 어디에서인가 계속 이어지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등려군의 노래가 흘러나오길 기대했지만 그건 그야말로 헛된 기대에 불과했다. 맥도널드 매장에서는 시끄러운 음악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등려군의 노래를 추억하며 살기에는 너무 바쁜 세상이다. 특히 최근의 홍콩은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혼동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런 홍콩에서 등려군의 노래가 흘러나오길 기대하는 사람은 나처럼 한가한 여행자들 밖에 없을 것 같다.
<첨밀밀>은 1997년에 개봉했는데, 바로 그해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이후, 홍콩 영화는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홍콩 자본 중 상당수가 해외로 빠져나갔고, 홍콩은 경제. 정치. 문화 모든 측면에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이 '심의'라는 틀을 만들어 놓고 모든 것을 재단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홍콩 영화의 개성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앞이 안 보이던 내 청춘과 함께했던 홍콩 영화들. <중경삼림> <아비정전> <첨밀밀> <해피 투게더> <타락천사> <동사서독>... 캔톤로드를 거닐며 이제 세월의 저 편으로 흘러가 버린 그 영화들을 추억해 본다.
무거운 어둠이 내린 영화관에 웅크리고 앉아 홍콩 영화를 보며 내가 느꼈던 그 쓸쓸함과 허무함. 그리고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인가에 대한 동경. 내 청춘의 그 숱한 감정들은 다 어디로 흘러가 버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