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여행 마지막 날. 비행기가 저녁 시간 때라 우선 체크 아웃을 하고 짐은 숙소에 맡겼다. 가이드북을 보니 홍콩에 왔다면 소호와 란콰이풍 거리는 꼭 가 봐야 한단다. 이색적인 거리 풍경과 독특한 상점들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한다. 어제 란콰이풍 거리는 걸어 봤으니까, 오늘은 소호 거리를 찾아가 봐야겠다.
소호 거리에는 마치 영국의 펍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가게들이 많았다. 텔레비전에서는 프리미어리그 경기가 방송되고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맥주잔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여기가 영국인지 홍콩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다 '칠 아웃'이라는 펍을 지나게 되었는데.... 뭐야, 한일전 야구잖아! 그것도 결승전! 처음에는 그냥 지나쳐 가려고 했다. 하지만 한일전이지 않은가. '그래, 점수만 확인해 보고 가자.' 나는 문 앞에 멈춰 서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행히 가게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어서 문 밖에서도 경기를 관람할 수 있었다.
경기는 팽팽한 투수전이었는데 일본이 1:0으로 리드하고 있다. 일본팀 선두타자가 2루타를 치고 나갔고, 한국팀 투수 코치가 마운드로 올라와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 팀이 이렇게 긴급한 상황에 처했는데, 그냥 못 본 척 지나가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염치 불구하고 최대한 문 가까이 가서 가게 안을 들여다봤다. 두 테이블에 손님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도 야구 응원 중인지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가게 사장님이 나를 보더니,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 구경하라며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뜻밖에 그 거게의 사장님은 한국 사람이었던 것이다. 오래전에 홍콩으로 이민을 와서 이 가게를 차렸단다. 나는 못 이기는 척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맨 뒷자리에 엉거주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게 안 손님 구성이 재미있었다. 한쪽 테이블에는 한국인들이 앉아 있었고, 또 다른 쪽에는 일본인들이 각각 자국의 팀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 두 무리는 다국적 기업에서 함께 일하는 회사 동료들인 것 같았다. 한국팀 선두 타자가 2루타를 치고 나가자마자, 김대리라는 분은 열심히 시나리오를 짜기 시작한다. "과장님, 제가 시나리오 한번 짜 볼게요. 다음 타자가 홈런을 쳐서 우리가 2점 납니다. 두고 보세요." 하지만 결과는 삼자 범퇴였고, 허무하게 4회 초가 끝났다. 일본인들은 역투를 펼치고 있는 자국의 투수를 향해 가볍게 박수를 쳐 주었고, 한국인들은 목이 타는지 맥주를 한잔씩 더 주문했다.
사장님은 나에게도 맥주를 내다 주셨다. "서비스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드세요." 나는 솔직하게 사정을 말씀드렸다. "인도 여행을 하고 스톱오버로 3박 4일 동안 홍콩에 들렸는데,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오늘 밤 비행기로 귀국을 하게 돼서..." 그러자 사장님은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손을 휘휘 저으셨다. "에이, 서비스라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먹으면서 구경해요. 나도 젊었을 때 배낭여행 다녀봐서 알아요. 인도에서 온 거면 뭐 뻔하지." 그동안 꽤 많은 곳을 여행해 봤지만 이런 환대는 처음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김대리의 시나리오는 쉼 없이 이어졌다. "자, 보세요. 다음 타자는 삼진으로 잡고, 그다음 타자는 더블 플레이로 잡습니다." 하지만 그 예측은 매번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러자 결국 과장이라는 분이 버럭 화를 냈다. "김대리 제발 그놈의 시나리오 좀 쓰지 마." 김대리는 기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과장님."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한국팀 선두타자가 안타를 치고 나가자, 김대리의 엉터리 시나리오는 다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사장님은 가난한 배낭여행자가 안돼 보였는지, 양념 통닭 3분의 1마리를 가져다주셨다. 정말 과분한 환대에 몰둘 바를 모르겠다. 술집 주인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짜로 술과 안주를 대접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비행기 시간이 다 되어서 야구를 끝까지 못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맥주와 안주는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싹싹 비웠다. 사장님은 언제 다시 홍콩에 오게 되면 또 들리라며 문 앞까지 배웅을 해 주셨다.
홍콩의 소호 거리에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벽화도 있고, 골동품 상점도 있고, 빈티지한 물건들을 파는 아기자기한 상점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 기억 속 소호 거리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홍콩의 소호 거리라고 하면 칠 아웃의 뜨거웠던 그 야구 응원과, 사장님에게 받은 뜻밖의 환대 밖에 기억나는 게 없다.
여행을 하다 보면 낯선 곳을 헤매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어려움에 맞닥뜨리는 순간이 있다. 나 또한 아무 연고도 없는 곳을 헤매며 불안에 떨던 순간이 꽤 많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럴 때마다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 다시 생각해 봐도 신기하기 짝이 없다. 마치 내가 어려움을 당하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누군가가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던 것이다.
길을 잃은 나를 위해 일부로 30분을 걸어서 길을 안내해 준 터키 아저씨, 숙소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나를 위해 자신의 맨션을 빌려 주었던 스피크(그 친구의 별명이다), 스틱도 없이 히말라야 트레킹에 나서는 나를 위해 자신의 스틱을 건네주고 간 한국인 아저씨 등등 여행을 다니며 내가 받은 도움과 환대는 이루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그들의 도움과 환대 덕분에 그동안 나는 큰 문제없이 혼자서 잘도 여행을 다녔다고 생각한다. 하도 많은 도움과 환대를 받아 봐서일까. 여행 중에 누군가가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먼저 다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편이다. 준만큼 받으려고 하지 않고, 그냥 주려고 하고 있다.
내가 베푼 그 작은 환대가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환대를 베푼다면, 그렇게 환대가 도미노처럼 이어진다면, 이 세상은 좀 더 나은 곳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돌고 돈 환대가 다시 나에게까지 돌아온다고 생각하면 살짝 가슴이 두근거린다.
여행이 다시 시작되고, 언젠가 홍콩 소호 거리에서 칠 아웃 사장님을 다시 만난다면 "당신으로부터 받은 환대를 나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고 꼭 말해주고 싶다.